사랑이라는 불면의 형식
사랑하는 이들은 잠들지 못한다. 그들은 뒤척인다. 자면서도 깨어 있다. 무의식은 머릿 속을 빠져나와 별이 깔린 밤의 어둠처럼 은밀하지만 날카롭게 반짝이면서 대기 속에 부유한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에, 그녀의 머릿결이 그의 어깨에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물리적 거리는 상관 없다. 에너지는 서로에게 열려 있으므로 그들 주위는 미열로 들뜨고 따뜻하다. 무의식의 열기는 새벽 대기 중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한용운「님의 침묵」)처럼 예민하고 부드럽게 서로에게 삼투된다.
우주의 어떤 특별한 기운이 그들을 유일무이한 은하로 묶는다. 같은 차원에 속한다고 느끼는 유일한 동류 존재로서의 기분이 그들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끌어모은다. 연인들에게 불면(不眠)은 불가피하다. 서로 곁에 머물면서 존재의 기척을 항상 느끼기 때문이다. 불면은 그들의 고유한 존재 형식이다. 연인들에게 불면은 자신의 일부인 또 다른 존재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특권이 있다. 다른 곳에 있어도 그들은 서로 만질 수 있다. 촉감은 고도로 예민해진다. 손으로 터치하지 않아도 대기 중에 촉수가 생긴다. 머리로 인지하지 않아도 감각은 우주 전체에 세포처럼 퍼져있고, 몸은 그 안에 용해되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럽기도, 지나치게 격렬하고 차가우며 딱딱하기도 하다. 느낌은 살로도 물기로도 공기의 형태로도 변하고 전달된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만짐’은 휘발되지 않는다. 같은 은하 안에서 서로에게 열리고 날카롭게 파고들며 깊숙하게 스민다. 때로는 아프게 찌르고 찔린다. 촉촉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물일 수도 죽음의 피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극도로 예민해진 그들은 잠들 수 없다. 새벽은 그래서 그들의 고유한, 유일한 시간이 된다. 새벽에 잠 못 드는 것이 아니라, 잠들지 못하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시간은 새벽이 된다.
새벽의 편지는 사랑의 고유한 실천 형상 가운데 하나를 드러낸다.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들은 쓸 수밖에 없고, 잠들 수 없으므로 편지는 새벽의 일이 된다. 그들의 글쓰기는 '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이끌려 '써진다'. 타이핑의 형식이든 펜을 손에 쥐었든 간에 먹먹한 충동은 쓰고 있는 문장보다 먼저 이미 저 멀리까지 달려가 있다. 이 편지는 글쓴이조차도 쓰인 문장을 본 후에나 확인할 수 있는 자기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걸 '생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전달한 충동이며,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걸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절박한 에너지는 어떤 질서의 형태로 내 안에 특정하게 머물러 있던 것도 아니므로. 생각과 마음 이전의 말이 다급하게 질주하면서 써진 후에나 제 존재의 '병적' 현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글쓰기, 그것이 연인들이 쓰는 새벽 편지다. 그들은 곧 아침이 오면 드러날 그들만의 은밀성, 훤히 밝혀지는 세계에서 휘발될지도 모를 자신들만의 내밀한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가장 깊고 망막한 어둠 한가운데에 제 말들을 풀어놓는다. 그 말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낯설고 멀고 뜨거운 곳으로.
새벽의 편지는 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글쓰기가 아니다. 말들은 이끌리고, 붙잡히며, 홀리면서 달려간다. 그 문장은 낮에 쓰인 계약서 문장 같은 것과는 다르다. 사랑의 새벽 편지는 계산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지 않으며 표현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현실원칙과 교환가치와 학교문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새벽 편지는 '사회'라는 관념에 무지하다. 불면의 문장들은 달뜨고 고통스러우며, 달콤하고 유희적이며, 몽환적이면서도 의지적이다.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완강한 근본주의자의 마스크처럼 말들은 우회할 줄 모르며 직진성으로 충만한다. 편지로 옮겨지는 연인들의 말들은 오직 이 순간만이 유일하다는 듯이 그의 육체를 쏟아버린다. 이 시간은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나희덕「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연인들의 편지에는 교수나 과학자의 지성, 또는 기업가의 전략을 무색하게 하고 무너뜨리며 넘어가는 영웅적 모험가의 에로티즘이 깃든다. 어둠 저 편 존재를 향한 이 갈급하고 맹목적인 정념은, 제 유한성을 남김없이 소모해버리는 간절한 절대주의를 통해 무한성의 광야를 증언한다.
의사도 진단할 수 없는 미확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잠들지 못하는 새벽을, 연인들의 시각이라고 부르자.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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