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북치는 소년」(1969)
김종삼의 이 시는 대체로 모호한 시로 읽혀 왔으며, 이 모호함은 그의 시를 '절대성의 추구'나 '순수미의 화신' 같은 말들로 설명하게끔 하였다. 범속한 문학사에서 어떤 해석자들이 그에게 '유미주의자' '미학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 시인을 그 근방 어디에 위치시키는 일도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함이란 어디까지나 독자의 입장에서이지 시인의 편에서는 아니었을 터이다. 시적인 말을 얻게 될 때 시인이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소박하지만 뚜렷하게 빛나 스스로 들어올려지는 어떤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뚜렷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짝이는 장면이 통속적 말들의 파편들 위에서 새로운 풍경으로 드러날 수 있었겠는가. 이때 풍경은 '절대성'이나 '순수미'와 같은 '내용 없는' 설명어로 딱지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탁월한 시적 풍경이 현실 없는 추상에서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것은 남루한 현실 한가운데에서 벼려진 시인의 감각이 날카로운 대립의 계기를 통해서만이 길어올릴 수 있었던 변증법적 시간의 한 실루엣이다.
시를 범속한 리얼리즘적 시각으로 읽는 일은 우선 자연스러우며 널리 알려져 있는 독법이기도 하다. 이 시의 풍경도 그렇게 읽혀 왔다. 시가 씌어졌던 때의 사회 상황을 감안할 때, 가난한 아이는 한 시대의 가난을 대변하는 전형이 된다. 이때 2연의 정황은 한 시대의 정황을 전하는 메타포가 되며, 1연은 2연의 정황에 대한 추상적인 요약 진술이 되고, 3연은 1연의 추상적 진술에 대해 일정한 감정이입을 통해 구성된 한 이미지를 다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독해의 연상 과정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이렇다.
어느 날 한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 나라의 누군가가 쓴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착한다. 전쟁을 치른 후 폐허가 되어 있던 당대 상황을 참조한다면, 아이는 전쟁고아로서 고아원에 있던 아이일 수 있으며, 카드가 배달된 장소는 아이들이 지내는 어떤 시설이나 학교일 수도 있다. 아이는 그곳으로 부친 단체 위문편지 같은 서양 나라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제목으로 보아 크리스마스 카드의 표지에 아마 '북치는 소년' 그림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서양 나라의 카드는 아이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 현실과 섞일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 카드에 담긴 인사와 축복의 메시지는 아이의 가난한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카드의 표지는 아름답지만 그 역시 이 폐허의 삶 어디에도 수락될 수 없는 모양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북치는 소년의 천진한 카드 이미지는 가난한 아이의 삶의 현실과 대립한다. 그렇다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카드의 내용-이미지와 아이의 현실 대립을 압축한 아이러니 진술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3연의 "진눈깨비"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다시 이미지로 전환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이어 해석될 수 있다. 눈이 되지 못한 채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는 카드의 아름다움이 지닌 공허함, 추상성, 일시성과 호응한다. 진눈깨비는 눈처럼 세상을 정화하지 못하고 내리면서 녹아버린다. 축복처럼 내린 하늘의 순결한 메시지는 어느새 실체 없이 순간적이고 추적추적한 진창 바닥이 되어 삶의 남루함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그림자가 되고 만다. 이렇게 시를 읽을 때, 시의 정황은 아이러니의 산물로서 일말의 비극미를 품은 풍경이 된다.
이렇게 시를 읽었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물론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시는 한 시대의 비극을 압축적 진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적 독법 후에도 남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여운이다. 기묘하게도 독자들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현실의 알맹이를 탈각시킨 공허한 무엇이라는 설명을 듣고서도 이 진술에 매혹된다. 그렇다면 이 매혹을 짐짓 모른 체 놔둘 것이 아니라, 비극적 역사의 실재를 부각시킨 이 리얼리즘적 해석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미뤄둔 채, 다른 각도로 이 풍경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읽은 이 해석은 이 시를 풍경의 외부에서 '비평적으로' 읽었을 때다. 여기에서 풍경은 시가 씌어진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어 공간적으로 조망된다. 그러나 풍경의 내부로 들어가 삶을 살아보자. 바깥에서 조망된 비평적 풍경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로 살아보자. 그때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시간적으로' 경험된다.
가난한 아이에게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착한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카드는 아이가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삶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능성의 표지로 느닷없이 등장한다. 아이에게 카드의 내용은 중요하지가 않다. 이 말은 카드의 내용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카드는 내용과 무관하게 반짝이고 내용을 모르고도 매혹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물이 된다. 폐허의 현실에서 먼 나라에서 온 카드는 서양이라는 주소지의 공간성이 아니라 이 삶을 유일한 삶으로 여기지 않는 다른 시간성의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북치는 소년'은 가난한 아이와 대립되는 상관물이 아니라, 아이가 그 표지의 인물로 자신을 대입하는 매혹의 이미지가 된다. 아이는 거기에 쓰인 어떤 내용과 무관하게, 아니 그 내용을 보지 않고도 이 사물에 붙들린다. 아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통해 북치는 아이를 본다. 북치는 아이는 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다른 아이지만, 이 존재 형상에서 가난한 아이는 대립의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 말고 다른 풍요의 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른들은 카드에서 대립적 현실의 남루함을 인식하고 이 현실에 절망하지만, 가난한 아이는 카드를 통해 결핍되어 있기에 이 현실에 필요한 무언가를 바라고 기도하는 감각을 갖게 된다. 아이의 심장은 콩콩, 쿵쿵, 두둥둥, 더 빠르게 더 세게, 더 신나게 북을 치기 시작한다. 아이는 설렌다. 이 설렘이 아이를 북치는 소년으로 바꿔 놓는다. 현실 너머 카드의 세계는 북치는 아이로 인해 지금 풍경의 일부가 된다.
이 현실이 다른 현실로, 이 시간이 다른 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개방성의 인지, 감각의 깨어남은 그 자체로 희망을 고지한다. 희망은 희망의 내용이나 조건이 갖추어져서가 아니라, 희망을 희망하는 감각의 생성이 성립시키는 존재 사건이다.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구원'의 상징은 구체적 내용을 통해 가난한 현실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의 인지 자체가 다른 삶을 상상하게 하고, 주체를 깨어나게 한다. '구원'과 '메시아'는 희망의 한 탁월한 심볼이다.
많은 경우 탁월한 아름다움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형상으로 고지된다. 이 아름다움을 '사랑'이라는 존재 사건의 메타포를 통해 추측해 봐도 괜찮다. 매혹은 아름다움의 고유한 존재 형식이다. 매혹은 '홀리는' 경험이다. 홀릴 때 우리는 왜 우리가 그것에 홀리는지 알지 못하면서 홀린다. 매혹에 대한 구구절절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에 매혹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내용 없는" 매혹은 매혹의 전제조건이자 존재방식이다. 탁월한 아름다움은 설명될 수 없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내용의 공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무한성을 뜻한다. 존재의 무한성과 깊이에 유한자인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사물의 수수께끼에 이끌리게 되며, 이 순간 다른 장과 다른 시간으로의 경로가 열린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는 사물의 형상으로 주체에게 느닷없이 다른 시간의 통로를 연다. 아이가 가난하다고 하여 그 현실이 남루하다고 해서 아이에게 다른 차원에서 평행우주처럼 공존할 낙원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그 아이가 한 낙원을 꿈꾼다고 하여 이 꿈을 사치라고 폄하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현실원칙에 구속되고 교환관계에 속박되어 있으며, 노동의 시간으로 점철된 것이 일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희망할 수 있다. 희망을 희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욕을 지닌 존재로서 '생명'('살아있다')의 참뜻을 지시하며, 이는 생명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재론적 사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치는 쾌락원칙을 깨어나게 한다. 이 사치는 너는 네 현실에 부합하는 수준의 어떤 걸 욕망할 수 있을 뿐이라는 현실원칙을 가볍게 무시하고, 저를 둘러싼 제약을 물리치고 아직 가동하지 않았던 제 미래의 존재 에너지를 즉각적으로 당겨 누리려는 소망을 발동시킨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은 아이는 자기에게 내재된 생명의 의욕을 비로소 감지하고 북을 칠 것이다. 북을 치기 시작한 아이에게 눈인가 진눈깨비인가, 눈이 쌓이는가 진창으로 녹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회복된 낙천성은 당장 "반짝이는" 낙원을 볼 것이므로. 진눈깨비는 너머의 실루엣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가상성을 의미하는 듯도 하지만, 금세 녹아내린다고 하여 이것을 실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짝임을 본 존재가 이미 이 현실에서 너머에 속한 물리적 주체로 변화하지 않았는가. 북치는 소년은 억지로 노역하며 가난의 현실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유희적 기분을 통해 벌써 저 낙원에 참여하는 존재로 산다. 유희란 이 세계에서 이미 존재의 지복을 누리며 사는 생명의 모습이 아닌가. 이 지복의 누림은 그가 이 시간을 기뻐할 때만이 가능하다. 이는 현실의 조건을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너머를 고지하는 다른 가능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다. 북치는 아이는 예수가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의욕의 형태로 실천한다. 북을 치는 아이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깃든 구원의 의미를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저 포기하지 않는 지혜의 방식으로 실현한다. 니체 식으로 말한다면 아이는 주인의 도덕으로 산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해석적 잉여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아름다움의 '내용 없음'은 지금 시간의 표면이 낙원의 시간을 파지한다는 신비에 기인한다. 아름다움의 아우라를 생산하는 무한성이란, 삶이 또 다른 지평으로 열려 있다는 뜻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시간을 긍정하지 못하는 이는 언제까지나 낙원과 닿지 못한다. 존재의 긍정 자체가 하나의 낙원이기 때문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통인동 154번지 '이상의 집' 프로그램 디렉터이며,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총괄디렉터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5915883527
시민행성 https://www.facebook.com/citizenplanet.or.kr/?ref=br_rs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DMZ Creative Post)
https://www.facebook.com/dmzcreativepost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