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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r 06. 2019

화장하는 시간

여자의 외출에는 특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여자에게는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볼 때 외출 준비에 드는 시간은 성별 간에 다소 차이가 나는  듯이 보인다. 대체로 남자의 외출 준비 시간보다 여자의 준비 시간이 더 든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어쩌면 남자에게는 외출을 위한 '준비 시간'이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지간한 옷만 입고 있다면 누군가의 호출에 바로 나갈 수도 있는 게 남자다. 통상적으로 여자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다. 남자는 덜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여자에게는 생략될 수 없는 시간이거나 매우 공을 들이는 준비 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화장하는 시간이다.


화장하는 남자들이 늘어난다는 소문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다수라고 하기는 어렵고, 대개는 피부 보호를 위해 스킨이나 로션 바르고 외출하는 정도다. 이 정도를 화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생략되는 경우가 남자에게는 많다. 이에 비하면 여자의 화장은 체계적이고 전투적이며 생략될 수 없는 필수과정으로 여겨진다.  짦은 시간을 쓰든 긴 시간을 쓰든 간에 이 시간은 대단한 집중력이 발휘되는 시간이다. 여자의 화장이 피부정돈을 위한 기초화장으로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수준에서 끝나는 일은 별로 없다. 피부에 색깔을 입히기 위해 얼굴에 전체적으로 파운데이션 화장을 하고, 눈을 위해서만도 아이라인을 얇고 선명하게 그린 후 속눈썹을 세우기 위해 마스카라를 하며, 다시 눈썹을 또렷하게 그리고서는 눈두덩이 주위에 명암을 넣기 위해 아이세도우를 하곤 한다. 볼터치로 얼굴에 홍조를 띠게 하고, 미묘한 빛깔로 뉘앙스 차이가 구분된 립스틱으로 입술에 생기와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마나 콧등이나 턱선 부근에 또렷한 입체감을 주기 위해 하이라이터 작업을 하기도 하고, 얼굴의 윤곽을 작게 보이려고 쉐이드 작업을 추가하는 일도 적지 않다.



여자의 화장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담은 유튜브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다가 종종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섬세하게 발휘되는 집중력은 능수능란한 손놀림을 통해 정확하고 신속하게 그 결과를 얼굴로 반영한다. 외출 전 이 절차는 너무나 정성스러워서 이전과 이후의 시간에 마치 독립적인 별도의 시간 하나를 도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 외출이 화장을 하기 위한 핑계처럼 보이는 경우까지 있다. 이 집중성에 프로이트가 관심을 기울였다면 제의에서 보이는 강박증과 비슷하다고 해석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절차적 세부의 예민함, 반복성(주기성)에 대한 집착, 행위의 무의미성 등을 근거로 종교적 제의(예배)의 강박성을 거론한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여자의 화장 장면이 문득 그와 유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존재 변이를 하는 통과제의


굳이 과장되게 화장의 강박증적 성격을 관찰하지 않는다 해도,  화장이 일상에 명백히 통과제의적 시간을 반복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직관처럼 세속에는 저도 모르게 성스러움의 건립에 참여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성스러운 제의는 그 과정을 통해 참여자에게 존재 변이가 일어나는 퍼포먼스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집 안에서의 얼굴과 외출 후의 얼굴이 크게 달라지는데,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화장이라는 통과제의를 자발적으로 치르기 때문이다. 화장 후의 얼굴은 다른 마스크를 쓴 다른 페르소나(persona)-인격체가 된다. 화장 후의 페르소나를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사회적 얼굴'이라고 해도 틀린 얘기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러한 설명이 화장하는 시간에 일어나는 존재 체험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최근에 개봉했던 음악영화 《스타 이즈 본(Star is born)》(2018)의 한 장면은 화장의 제의적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음식점 웨이트리스였던 앨리(레이디 가가 역)는 짙은 색 붉은 립스틱과 강렬한 마스카라, 매우 과장된 테이프 눈썹을 붙이고는 카리스마가 작렬하는 무대의 가수로 돌변한다. 노동하는 낮의 세계가 강력한 성적 매력을 내뿜는 밤의 세계로 전환되는 계기에는 화장이라는 통과제의적 시간이 있다.


 

영화 《스타 이즈 본 Star is born》(2018). 앨리 역의 레이디 가가


화장이 유발하는 존재 변이에서 확실한 결과는 이 제의의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의 파워를 강화한다는 사실이다. 이 파워의 현실적 목표가 시각적 섹슈얼리티의 강화라는 점은 두말 하면 잔소리겠지만, 역시 이렇게만 얘기하는 것은 섹슈얼리티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시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식상다. 화장이 만든 섹슈얼리티를 내적 체험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그 말뜻의 정확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 의미의   '코나투스(conatus)'에 부합한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 시간은 주체의 의지를 강화하며, 신체적 차원에서 충동-정념 등을 고양시키는 충전의 시간이지 않는가. 화장한 앨리의 노래와 춤이 코나투스의 표현이며, 그것이 앨리를 웨이트리스에서 가수라는 '액터actor--스타star'로 바꿔놓는다. 드라마적으로 강조되지는 않지만, 오늘날 고양된 '숭고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스타 탄생(star is born) 과정에서 분명한 시각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앨리의 얼굴은 화장이 본래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면이 있다. 그녀의 얼굴은 전쟁이나 사에 나서는 전사들이 화장으로 '무장'했을 때의 얼굴처럼 비장하고 강력해졌으며, 대담한 에너지를 품게 되었고, 그래서 억눌린 그녀의 본성은 해방된다. 화장하는 시간은 본 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비과정으로서의 의식, 즉 의식을 치르기 위한 의식으로서 통과제의적 시간이지만, 그 자체가 갖는 에너지 전환성은 독자적이고 강력하다.  


그렇다고 하다라도 오늘날 화장이 갖는 의미가 옛날의 화장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미묘하지만 적잖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 형식구조에서 희미한 고대적  흔적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전사의 화장이 토템이나 신의 모방을 통해 인간의 기백을 자연-우주적 에너지와 언결시키려는 데에 비해, 오늘날 화장은 남녀 모두를 막론하고 자연과 연결되는 원초성을 잃어버렸고,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유명 화장품 메이커가 알고보면 중세의 연금술사를 모방한 글로벌 '화학공장'의 오너들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화장이 지닌 인공성의 물리적 메타포가 되겠지만, 설령 어떤 화장품이  유기농 에센스를 사용한다고 한들 이 사실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는가. 보들레르의 인공낙원처럼 또는 그의 창부(娼婦) 예찬처럼, 이 시대의 화장은 문명의 삶이 자연을 분리시키면 분리시킬수록 인공미를 통해 아름다움의 창조에 다가간다는 현대성의 이념을 역설한다. 현대는 끊임없이 과거를 부정하고 자연과 단절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며, 이 추구는 인공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갱신을 강박적인 형태로 요구한다. 자신의 자식을 낳자마자 모조리 잡아먹는 고야의 그리스 신 그림처럼, 현대는 자기 부정의 강박적 시간성이자 인공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 강남대로변에 즐비한 성형외과들은 화장술이 이루려고 했던 현대적 시간성의 완성이며 이념적 종착지라고 하겠다.



 20세기 초의 미학자 벤야민은 앙리폴레스의 말을 인용하여 '현대적 남녀의 원형을 창조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의류 장사이며, 이때 마네킹은 육체의 이미지가 되며, 영혼은 이 육체를 반영한 이미지에 불과하다'(《아케이트 프로젝트》)고 기록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같은 메모묶음에서 당대 시인 기욤 아뽈리네르의 말을 인용하여, 현대의 패션(산업)이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면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에 길을 만드는 새로운 페티시의 창조자라고 직관하기도 한다. 벤야민의 인용자들이 현대(라는/의) 패션에서 공통적으로 본 것은 무기물, 즉 죽은 것으로의 회귀 충동이다. 그들이 태동하고 있는 대규모 패션산업에서 예감한 마네킹의 육체와 그 육체가 반영된 영혼의 이미지는 얼굴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 표면은 밋밋한 자연적 얼굴이 아니라, 거의 기하학적 비례식과 수학적 풀이과정을 따르는 현대적 화장법이 생산한 인공 페이스였다. 벤야민은 그들의 직관에 더해 이 인공적이고 강박적인 이미지들의 표면들에서 덧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성, 미의 창출에 얽힌 계급적 전략을 읽는다.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동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겠으나, 이 둘 사이에는 시대적 간극만큼이나 원리적 차이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표면에 깃든 '아우라(aura)'의 여부이다. 다시 벤야민을 참조하면 아우라는 '가까운 것에 깃든 먼 곳의 실루엣'이다. 그 '먼 곳'을 지금 이 자리에 깃들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제의였다. 원형적 차원에서 화장하는 시간은 세속에 도입된 제의적 시간이다. 여기에서 화장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먼 곳'으로부터 불러들인 존재가 내 얼굴과 결합할 때 갖게 된 코나투스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코나투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일상적인 화장의 시간에서 그 '먼 곳'의 느낌을 기억하고 원하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심의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기획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으로서 미래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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