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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쇼핑은 즐거워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이 글은 6월 10일에 썼다)

 봄인줄 알았는데 여름이 됐다. 사주에 나무가 많다는 나는 나무를 닮았나보다. 봄부터 여름까지 태양빛과 열을 담뿍 받으면 확실히 살 만하다. 기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산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간다.
 요즘 내게는 시간이 가장 가까운 친구다. 돈은 가장 좋은 친다. 일하고 돈쓰고 또 일하고 돈쓰고 그렇게 2018년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새로 맞춘 안경은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한 후배는 “선배, 인생샷찍을 안경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냥 잘생기고 예쁘다고 하면 되지 안경 덕이라고 하다니 사람들도 참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무튼 많은 사람들이 쓰는 동그랗고 까만 티타늄테 안경테인데 아무튼 나에게 잘 어울린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난시가 있는 왼쪽 눈 도수를 너무 높게 잡은 것이 흠이었다. (안경사님이 분명히 이게 맞다고 했는데!) 위가 좋지 않아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데도 이 안경을 끼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서일까. 내 눈은 높은 도수의 안경에 역시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 하지만 결국 지난 주말에 나는 안경을 새로 맞췄다.
 선배들과 서대문구 안산에 오른 뒤 낮부터 저녁까지 엄마랑 쇼핑을 했다. 일단 둘의 안경을 새로 맞췄다. 엄마와 내가 가는 곳은 서울 남대문에 있는 작은 가게이다. 나는 그곳이 좋다. 일단 안경 쇼핑은 죄책감이 덜하다. 쇼핑을 하러 가는 거지만 소득공제가 된다는 점에서 꼭 해야만 하는 소비라며 위안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이유로 안경점은 병원에 온 것 같아 관리받는 기분이다.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세심하게 신경써주니까 그렇다.

  우리는 그 집에서 안경을 맞춘 게 두 번째밖에 안됐는데 단골집으로 삼을까 한다. 소담한 가게 크기도 마음에 들고 무심한 사장님과 친절한 사모님도 좋다. (전에 내 안경을 잘못 맞춰줬는데!) 엄마랑 나는 한참을 사모님과 사장님과 떠들고는 안경을 주문하고 나왔다. 

 엄마랑 나는 남대문에서 야채호떡도 사먹고 명동에서 명동교자칼국수도 먹었다. 내게는 일과 중에 의미없이 지나치는 도심의 번잡한 남대문시장과 명동 거리이지만, 엄마에게는 안경점 나들이가 곧 시내 나들이이기 때문인지 매우 행복해보이셨다.

 이날은 진정 쇼핑의 날이었다. 백화점에 잠시 들렀는데 10% 세일기간이라는 말에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매장에서 한시간 넘게 머물러있었다.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피팅룸을 전세낸 듯하게 들락날락거렸다. 하지만 정작 내 옷은 하나도 안 샀다. (2만원대 구두 하나는 골랐다. 살 때는 예뻐보였는데 신고다니다보니 촌스럽다) 대신 엄마가 마음에 들어한 여름 블라우스와 둘째를 임신 중인 새언니 임부복을 구입했다. 5월에 쇼핑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점원에게 카드를 내미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것이기에 당연히 지출해야 한다고 나를 위로했다.  

 궁금하지도 않을 쇼핑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나 스스로 내가 돈을 벌고 쓰는 이 과정이 대견하고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져서이다. 가장이 된 후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안에는 30대 싱글녀가 아니라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인 중년 남성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회사에서 뒤통수를 맞고 지랄맞은 일이 있어도 나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힘들 때 쓰러지면 안되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건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장으로 살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럴 때면 조금 눈물이 핑 돌지만, 또 가장이라서 가족들에게 이런 선물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쇼핑은 성공적이었다. 내 안경과 엄마 선글라스, 보조 안경은 눈에 잘 맞았다. 새언니의 임부복도 내 느낌에는 새언니가 좋아한 것 같다. (내 앞이라서 그랬을까;) 엄마의 하얀 블라우스는 조금 손이 많이 갔지만 결과는 좋다. 무려 XL사이즈로 성장한 엄마의 몸매 덕분에 사이즈 큰 옷으로 바꿔야만 했지만. 옷 하나를 사면 거기에 맞춰입을 속옷도 사야 하니 역시 XL인 하얀색 브라탑을 추가로 구매했다. 그래도 엄마에게 잘 어울리는 블라우스 한 세트가 생겨서 좋았다.

 아무리 봐도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가장이라 쇼핑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쇼핑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국 출장길에 데려온 '뉴지'. 워싱턴D.C에 있는 뉴지엄박물관에서 데려왔다. 골든리트리버로 이름은 '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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