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돋보기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이유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이다. 일정한 속도의 소음이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비오는 날 우산 아래 서 있으면 나만의 우주에 들어온 듯 하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만 머물 수 있는 투명 캡슐에 들어와있는 것만 같다. 나는 객관적으로 볼 때 조용한 사람이다. (보통) 조용히 걷고 조용히 말한다.
반대로 나는 소음에 매우 예민하다. 냉장고같은 전자제품이 내는 기계음은 물론이고 옆집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도 잘 듣는다. 조용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화가 확 올랐다가 내려간다. 이미 발생해버린 소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면 한숨이 푹 나온다.
내가 이렇게 소음에 민감해진 데에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서, 신경이 예민해서라고 생각한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다. 겁도 많고 작은 감정 변화도 잘 느낀다. 장점일 때도 있지만 도시에서, 또 나와 전혀 다른 누군가와 살면, 단점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단점과 늘 싸우며 산다.
엄마와 나의 동거생활 중 가장 많이 싸우는 이유는 소음 때문이다. 엄마는 목소리가 크다. 장 보러 갈 때 엄마랑 길을 걸으면서 대화를 하면 주변에서 우리의 대화가 길 건너편에까지 들릴 것 같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엄마, 조용히 말해”라고 하는 게 습관이다. 엄마는 아이처럼 내 말을 잘 듣지만 매우 어색하다. 아마 나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엄마 모습이 그려진다.
목소리야 조절이 가능한데 엄마가 발생시키는 생활 소음은 나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 천재지변같이 갑자기 찾아온다. 몸이 아파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끙끙 앓고 누워있는 휴일 아침, 엄마가 외출하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부자리에 누워 아무말도 못 한채 인상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 시간 뒤 엄마는 다시 문을 쾅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늘 그렇듯 “제발 문 좀 살살 닫아줘”라고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온 엄마는 창문을 모두 열어두어야 갑갑하지 않다며 창문도 열고 닫았다를 반복했다. 끼익, 쾅, 끼익, 쾅. 집에서 쉬는 게 아니라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엄마, 나는 정말 소음에 예민해. 제발 현관문이랑 창문 여닫을 때 소리 안 나게 조심해주면 안될까?”
사정을 하면 엄마는 빨리 이해한다. 하지만 항상 그때뿐이다. 30년 넘게 같이 산 엄마인데 어떻게 이렇게 엄마 라이프스타일에 적응이 안 될까 매번 놀라면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엄마의 속도와 힘에 적응을 할 수가 없다.
“어머니 기능이 떨어지시는 건 아닐까요?”
엄마와의 일을 상담받을 때 의사선생님은 그렇게 엄마 편을 들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딸이다.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 의사선생님 말대로 엄마의 기능 중 무엇이 떨어졌을까 생각해봤다. 청각이 무뎌져서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을까. 손에 힘이 없으니 무거운 현관문을 끝까지 잡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엄마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너무 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닫는다. 난 엄마가 변하길 바란다.
“엄마. 엄마는 섬세하지는 않은 것 같아. ”
손이 빠른 엄마가 뚝딱하고 내어준 저녁을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를 했다. 엄마가 반박을 하는 것같다가도 금세 인정했다.
“아니, 한다고 하는데 잘 안 돼. 맨날 까먹어.”
예민한 내 탓을 하지 않아 고마웠다. 엄마도 자기 객관화를 하면서 사는 걸까. 말한다고 변하면 어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른인 엄마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도 안다. 엄마도 이렇게 예민한 딸 때문에 자유롭지 않겠지만, 그래도 딸이 있어 좋다면 내게 깜짝 놀라지 않을 권리와 시끄러운 소음에서 자유로울 권리를 지켜줬으면...하는 바람은 있다. (이런 글을 쓰고 보니 수십년 전혀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살게 되는 결혼이 더욱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