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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삿포로 네비게이터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덥다. 너무 덥다. 입만 열면 덥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한국이 싫은 이유로 너무 더운 여름을 추가하겠다. 해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뜨거운 해는 피하고 싶다. 칼퇴근만이 내가 회사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개김'인데, 집에 에어컨이 없다보니 집에 가기 싫을 정도이다. 폭염도 자연재해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 혹서기와 혹한기는 에너지 빈곤층인 나와 엄마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지난 봄에 오래 쉬어서 휴가 계획이 따로 없었는데, 휴가를 가야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 늦여름 나와 엄마는 최고의 일주일을 보냈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로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엄마는 5박6일, 나는 혼자 좀 더 놀고 오겠다며  8박9일을 머물렀다. 그렇게 파랗고 맑은 하늘을 언제 볼 수 있을까.  매 순간 행복했다. 엄마랑 함께 떠난 첫 해외여행이라 더 뜻깊었다. 너무 많은 추억을 쌓았기에, 올해 여름 휴가 계획이 없는 나는 꽤 자주 지난해를 떠올리며 우울해하고 있다. 

 엄마와 나의 여행은 엄마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됐다. 엄마와 나는 5분 차이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에 갔다. 엄마는 D항공, 나는 T항공이었다. (엄마는 기내식을 드셨고 나는 못 먹었다) 암튼 표를 구하지 못 해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탔지만 입국심사를 받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뱅기는 다행히 제 시간에 도착을 했는데 입국심사대 앞에 있어야 할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중국 비행기가 함께 내렸으니, 중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엄마를 찾기 위해 나는 정말 입국심사대로 연결된 모든 통로를 뛰어다녔다. 엄마와 핸드폰 연락도 안 되는 상황,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15년 전에 한두번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출국한 여행초보였다. 엄마가 입국심사 무섭다고 했는데, 일본어도 영어도 잘 못 하는 엄마를 잃어버렸으니 같은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고 나는 계속 자책했다. 

 그때 엄마가 입국심사대 뒤편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상기돼있었다. 나도 심사를 받고서야 엄마와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공항 관계자가 심사받으라해서 딸이 곧 내린다고 말했는데 못 알아들었다고 줄을 세웠다고 한다.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서 삿포로가 아닌 하코다테 지역의 호텔을 말했더니 또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암튼 엄마는 그렇게 무사히(?) 나의 도움도 없이 입국심사를 통과했다. 나를 만난 엄마가 어찌나 내 손을 꽉 잡았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여행 내내 나는 엄마의 보호자이자 안내자였다. 영어와 일본어를 둘 다 못 하지만 그래도 매사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엄마도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 엄마는 뛰어난 네이게이터였다. 한 번 간 길을 잘 기억하고 또 지도를 잘 보았다. 공간지각력이 떨어져 왼쪽과 오른쪽도 자주 헷갈리는 나에게는 없는 능력이 엄마에게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길을 잘 찾아?"

 "기준이 되는 건물 하나를 잡고 코너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기억을 해봐. 그러면 찾기 쉬워."

 엄마의 방법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다. 내가 실전에 잘 적용하지 못 했지만 엄마 말대로 기준이 되는 건물(보통 가장 높은 건물)을 두고 옆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잘 기억하면 좋은 걸 확인했다. 하긴 나는 운전을 못 하지만 엄마는 운전을 하는 것 보면 이런 점에서는 나보다 엄마가 훨씬 낫다. 

 어제는 37도를 찍은 거실에 엄마랑 같이 앉아 삿포로에서 사 온 삿포로를 마셨다. 거의 1년이 지난 맥주인데도 너무 맛있었다. 1년 가까이를 먹지 않고 남겨뒀던 이유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보이는 삿포로 캔을 보면서 삿포로에서의 환상적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어 행복했기 때문이다. 맥주를 잘 마시지 못 하는 엄마도 삿포로라 조금 마셨다. 엄마와의 추억을 돌아볼 때 2017년 홋카이도 여행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소중하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또한번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삿포로에서 오타루 가는 열차 안에서. 엄마는 길치인 내 단점을 보완해주는, 생각보다 괜찮은 여행 파트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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