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영 Nov 26. 2024

현재

과잉 친절이나 유난스러운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런 나를 보통 이렇게 설명해 왔다: 지속적으로 친절할 수 없다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아예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좀 더 거룩하게 표현하자면 진정성과 본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다. 


언젠가부터 언어를 신중하게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 내 마음, 이 상황, 이 논리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내 기준에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었지 사실 상대에게 잘 전달되는 언어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적확한 표현'을 쓴다는 칭찬을 받는 반면, 말이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말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내 표현에 갇혀, 통하는 언어가 아니라 내 욕심의 언어여서 그렇지 않을까 설명해 본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을 설명하고픈 욕구가 진한데, 그 어느 때보다 공부하기 싫은 요즘이다. 책을 거들떠보기도 싫어졌다. 나에게 무엇을 주겠냐는 강한 회의감?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그럴 힘이 너무 없다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나이는 점점 먹고 눈은 노안이 되고 뇌는 점차 혼탁 해져가만 가서 속이 상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내 마음 한편에 허영심도 자리 잡고 있다. 폼 나게 한번 인정받고 죽어야지, 이대로 되겠냐고 하는 마음 말이다. 그러나 삶의 동력이 별 건가 싶기도 하다. 허영, 허세? 그게 나쁜 건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신경을 쓰는 것이 내 내면의 것을 이끄는 동력으로 일부 기능할 수 있는 것이지. 물론 나라는 인간이게 그건 작은 추동력을 줄 뿐이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강한 인정욕구가 불러일으켜지며, 그에 반해 내 삶의 콘텐츠는 모순되게 존재하고 있다. 결코 나 자신을 놓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이 없어져버리는 것도 순식간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