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
새삼 고요함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른다.
여기로 이사 온 이후 2달의 시간이 흘렀다. 두 달이나 흘렀네.
그 이전에도 산 곳은 아파트였는데 그 아파트에서 지내는 4년 동안 윗집 소음이 없었다. 꼭대기 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층간 간격이 제법 확보되었는지 걷는 것도 큰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걸을 때 바닥 울림의 느낌이 별로 느껴지지 않으니 파급 효과가 별로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렇다고 마구 발망치를 찍어가며 걷지는 않았고 편안하게 걸어 다녔다. 물론 아랫집에서 컴플레인하는 일이 없었고 말이다.
또 그 이전에는 층간 소음이 취약한 아파트였고 적잖이 신경 쓰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사람 기억이 얼마나 알량한가. 그 후 4년간 좀 편히 지냈다고 불편함에 익숙해졌던 그 감각이 사라졌던 거다.
다시 층간 소음에 취약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재수 없게 예민한 아랫집이 당첨되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경을 쓰고 있으나 여전히 불편하시단다. 그들의 주관적 기준에 다 맞춰줄 수 없는 노릇이다. 나의 기본적인 일상생활권이 침해받는 기분에 이르기도 했다. 가족이 고3이고 남편은 논문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는 왜 하는지. 그런 대사를 읊을 만큼 우리가 뭐라도 했음 억울하지는 않지. 그들의 극도의 예민함을 방증하는 각종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고 무례한 것이라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이미 하고 있었다. 푹신한 실내화를 샀고 가족들에게 수시로 주의를 줬다. 실내화를 미처 못 신을 때면 뒤꿈치를 들고 걷고 슬라이딩을 하며 걷는다. 극도로 주관적인 그들의 기준에 완벽히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건 하나 내려놓을 때도 아랫집, 살짝 무심코 의자가 끌렸을 때도 아랫집을 떠올리는 상황이라니. 노이로제. 이걸 노이로제라 하는 거겠지. 애초부터 이것은 우리 집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아파트의 문제인 것을. 귀마개라도 하든지 이사를 가든지 해야 하지 않겠어?
이 집에서 거주하기 위해 치른 가치의 큰 부분이 소실된 것 같다. 나의 양심, 대체로 통용되는 상식에 어긋남이 없이 살아도, 타인의 너무도 다른 상식을 만날 때 이렇게 괴로울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아파트 생활이라는 큰 개념 안에서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아파트는 조악하게 지어졌는지 별소리가 수시로 들린다. 예전 아파트가 그런 면에서 그립기도 하고 심지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급 공감이 되기 시작하고 있다. 내 기준에서 비상식인 인간들로부터도 떨어져 살고 싶고, 사소한 것으로 엮이는 일은 없는 동떨어진 곳에서의 삶 말이다. 나의 소중한 것이 지켜지길 원하는 그 마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