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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진솔

개선의 노력인가 유난인가

by 말쿡 은영

요즘의 세태.


문제를 제기하거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일은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한다. 새로운 질문은 기존의 관성을 흔들고, ‘문제없음’을 전제로 굴러가는 사회적 관계의 평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의 실질적 이익이나 전략적 효과가 기대된다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충돌을 감내하며 변화의 길로 나아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특히 일상적 관계나 조직 안에서 개선을 위한 문제 제기는 종종 ‘유난’으로 치부된다.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냐는 식이다. 상대의 행위가 분명히 유감스럽고, 때로는 부당함조차 느껴지지만, 문제를 제기하려는 순간, “굳이 말해서 뭐 하냐”, “그냥 이해해라”,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는 조언이 따라붙는다. 마치 문제 제기를 시도하는 쪽이 관계를 어지럽히는 당사자처럼 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만약 "갱년기라 예민하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라는 식의 말을 한다면, 그리고 가끔 듣기도 했는데, 이는 심지어 폭력으로 다가온다. 나는 비교적 공공선, 또는 자체로 옳아야만 한다는 정당성 등의 가치에 방점을 많이 찍는 편이다. 도덕적 부심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생겨먹은 것이 이러하여 줄곧 피곤한 삶을 살아온 터다.


한층 더 당혹스러운 것은,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의 논거가 성급한 일반화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남자니까, 공대 출신이니까, 군대 문화 오래 겪어서 그래, 임원들은 원래 좀 그래.” 등과 같은 말이다. 이는 문제나 갈등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왜 끝까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괴로워하고 상대는 아무런 생각 없이 희희낙락하도록 두어야 하는가.


그 언행이 왜 문제인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가려진 채, ‘배경을 알면 이해하게 된다’는 논리만 반복된다.


문제 제기를 시도한 나는 순식간에 ‘너무 예민한 사람’, ‘이상적인 기준만 내세우는 사람’이 된다. 개선을 위한 시도는 ‘관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행위’로 오인되고, 그 과정에서 감정적 에너지를 소비한 쪽만이 조용히 퇴장하게 된다. 이는 결국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학습을 강화하고, 개선의 길을 닫는다. 이것은 현상유지일까? 각각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진짜 별일인 건, 문제를 보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태도 아닐까. 나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조차도 애써 무마하는 해석으로 덮어버리려는 건 아닐까? 관계의 평화가 침묵 위에 세워질 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억압이다.


내가 느낀 유감스러움, 납득되지 않는 장면, 반복되는 불합리함은 나 하나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작고 확실한 징후들일 수 있다. 그 불편함에 말을 붙이고, 원인을 찾고, 개선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시도는 관계를 깨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성숙시키는 일이다. 물론 이 모든 시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말할수록 관계가 멀어지고, 설명할수록 벽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문제의식을 외면하지 않고 이름을 붙이고 설명하는 삶을 잘 살고 있지는 못하다. 설명까지 하게 될 때 상대를 '설득'하고 싶어지고 그러자면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레 질려버리고 만다. 소통이 무엇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요즘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예민하다는 말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런 내가 좋다. 내 신경이 건드려지는 그 순간, 뭔가 촉발되는 그 순간이 나는 좋다. 고통을 오히려 선택하는 내가 괜찮다. 불평만 내뱉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같이 해보자고 결국 이야기해 내는 내가 썩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저 문제를 볼 뿐이다. 거기에 집중할 뿐이다.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 나의 문제를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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