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에 먼저 감사하다. 기존 페미니즘 책들 중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읽는 족족 어려워서 원망스러웠다. 좀 더 노력해서 풀어주지 공부한 거 그냥 이렇게 써놓으면 다냐라는 식의 유치한 감정을 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좀 더 친절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실천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대중과의 소통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므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의 7장 "페미니즘 계급투쟁"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백인 중상류층 여성들이 직장 내에서 일정한 권력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 그 변화가 저소득층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들의 삶의 조건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저자는 비판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단일한 여성 집단을 기반으로 작동할 수 없음을 드러내며, 계급에 따른 욕구와 억압의 차이가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깊은 분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필자가 현재 운영 중인 ‘리브스토리즈’는 '엄마사회학콘텐츠 연구소'로서,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성취 욕구의 억눌림의 원인을 사회구조적 분석을 통해 설명하여, 원인이 다양한 곳에 산재하고 있음을 알고 개인의 부담을 떨쳐버리는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다음, 이를 기반으로 삶의 전환을 모색하는 실천 전략을 설계하고자 한다. 나는 “욕구”에 집중하는데, 사회적 실현의 맥락에서의 욕구이며, 따라서 생존 이상의 차원, 즉 자율성과 창의성, 정체성과의 부합이라는 조건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는 계급적 위치에 따라 그 의미와 실현 가능성이 달라진다. 예컨대, 당장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가리지 않아야 하는 여성에게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겠다는 주장, 또는 자아실현은 사치로 보일 수 있다. 나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다른 이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7장에서 보여주었던 사례에서처럼 자신의 억압만을 중심에 두는 여성운동은 결국 다른 여성들의 현실을 지워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경우와 맞닿아 있다.
욕구는 항상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삶에서 출발하는 운동은 그 삶의 문맥 속에서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나의 페미니즘’은 나의 위치성에서 오는 나의 문제,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토대로 발달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서클로 묶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욕구와 억압의 양상, 실천 가능성의 구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인종·성적 지향·장애 여부 등에 따라 갈라진 여성들이 각자 분절된 운동만을 수행할 때, 페미니즘은 집단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사유의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다. 사회적 큰 특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의 창출이 어렵다. 따라서 완전한 통합이 불가능하더라도, 공통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느슨한 연대의 틀을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접점은 아마도 "욕구가 배제되지 않을 권리" 혹은 "삶의 존엄을 유지한 채 말할 수 있는 권리" 같은 지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충분히 강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의 문제가 아닐 때 다리 건너 저기 있는 먼 문제로 여겨진다. 운동성으로 이어지려면 ‘절감’ 해야 하는데 완전히 절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때 얼마나 진정성 있는 연대가 될 수 있을까 회의적이 되는 것이다.
결국, 각 계급과 정체성의 맥락에서 출발한 운동들이 서로를 듣고 해석할 수 있는 해석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을 때, 페미니즘은 분절된 욕구를 이어주는 보다 정교한 정치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듣고 대화하는 가운데 공동의 토대를 이뤄나가야 할 것이다. 단일한 목소리가 아닌, 교차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에 의한 운동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페미니즘의 미래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