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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Sep 11. 2023

自蔑; 당연하지 않은 것들의 습격

더욱 광폭해지는 시대의 불안정성의 이유


어느날 25년 지기 고등학교 동창을

오랬만에 만났다.


괘청한 날씨에도 그 친구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 보였다.


친구에게 자초지정을 물어보니 참 가관이었다.

최근에 투자한 알트코인이 폭락하면서 몇달만에

5000여만원이 허공으로 날라가서 허무하다는 것이다.

정말 듣도 보지 못한 이상한 이름의 코인에 수천을

투자한 것도 한심하거니와 이 친구가 진짜 허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한심했다.


며칠 꿈 속에 그 친구가 나왔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며칠 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정정하던 아버지가 급성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작고로 슬픔에 빠져

횡성수설하는 친구를 위로해 주기 위해

지방에 내려가 조문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

나는 혼자말로 말했다.


"친구야. 이게 진자 허무라는 거란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욕망하고 원하던 일들이

안되면 한숨을 내쉬며 '허무하다'고 습관처럼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그냥 절망스럽거나

우울한 것이다.


진짜 허무가 무엇인줄 아는가.

말리부 해변 절벽에 태평양이 보이는

수백억짜리 저택에서 기네스 펠트로를 닮은

초미녀 와이프와 잘 큰 아들 딸들

그리고 매일 아침 집안 청소로 바쁜 하녀들과

시중을 들기에 바쁜 집사들.

문득 아침에 창문을 열고  

광활한 태평양을 바라보니 사는게 별로이고 허무해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때 허무한게 진자 허무다.


혹은 내가 무엇인가를 위해 전력을 다해

혹은 인생을 바쳐 와신상담으로 도전한

어떤 일이 완전히 망해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때 허무다는 말을 할만하다.


우리는 진짜 허무를 잊은지 오래다.

우린 당연한 것들의 감사를 잊은지 오래다.

그래서 툭하면 허무하고 우울하고 짜증난다.

바야흐로 당연하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습격하고 비교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시대인 것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인지하는 불안과 우울은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서 무한히 비교하는 습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당연한 것들을 경시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추구하는 장식적인 욕망의 시류에

합류한 탓도 크다.


추억의 만화 '검정고무신'을 보면

기영이가 바나나가 먹고 싶어

시름시름 앓는 장면이 나온다.

바나나가 워낙 귀했던 시절

기영이는 바나나 하나에 인생을 걸었다.

부모님은 불쌍한 아들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귀한 바나나 하나를 사오고,

기영이는 그 바나나 하나를 가족 수대로

잘라 나눠 먹고서는 아픈게 씻은 듯이 나았다.


참 유치하고 정감있는 내용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바나나땜에 아쉬운가

아니면 바나나가 당연한가.

초등학생도 바나나주면 안 먹는 시대 아닌가.

우린 애초부터 바나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크면서 싸고 저렴한 과일이라고

인식했을 뿐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흔한 과일로 인식한 탓이다.


내가 서울 변두리 월세 반지하 원룸에 산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진짜 사는 사람도 있을테고, 나도 살아봤다)

자. 샤워할 때 온수도 기다려야 나오고

오래된 에어컨 냄새에 벽지에 약간의 곰팡이 냄새도 나고

가끔 거미도 나오고 바퀴벌레도 나오고 개미도

나와서 비참한가? 비참할 것이다.


그래서 내 꿈은 반지하 원룸을 탈출하는 것이다.

자. 노력해서 탈출했고 지상 원룸으로 올라왔고

벌레도 조금은 줄었고 곰팡이도 거의 없다.

이제 만족스러운가? 아니겠지?

조금만 지나면 감사한 마음은 금새 휘발된다.


그래도 인간답게 살려면,

방 2개에 거실 딸린 신축 빌라에는 들어가야지.

다시 꿈이 생겼다. 노력한다. 돈번다. 들어간다.

자. 5층 자리 신축 빌라에 2억짜리 전세로 들어갔다.

햇빛도 제법 잘들고 벌레는 보이지 않는다.

자. 이제 만족스러운가? 아니겠지?


거실 소파에 앉아 45인치 구형 LED 티비를 틀었다.

이제 LED는 끝이랜다. OLED는 있어야 될거 같다.

시그니엘 100층에 사는 연예인이 힘들다고 나온다.

외출 나갈때 보니 고급 외제차다.

볼수록 비교가 되서 TV를 꺼버렸다.

창 밖으로 겹겹히 둘러 쌓인 강남의 빌라촌을

내려다 본다.

나는 언제 여길 탈출 할수 있을까.

내가 바라던 희망이 이정도였나.

무언가 비참하다.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허무하다.


이게 우리의 못되먹은 욕망의 쳇바퀴 허무 시나리오다.

이 친구가 더 좋은 아파트와 더 좋은 집에

간들 만족할 지점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대체 어디인가.


내가 정한다고 그 지점이 되면 정말 만족할까?

이렇게 우리는 당연한 것들을 뒤로 미뤄 놓고

가지지 못한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인생을 바친다.


자. 여기서 잔인한 게임을 해보자.


내 친구가 코인을 잃기 전의 상황이다.


1. 코인으로 5000만원 날리고 아버지 10년 더 장수

2. 코인으로 5000만원 안 날리고 아버지 정시(?) 사망


이 게임에서 2번을 고르는 사람은 정말

괴인으로 인정한다. 아버지 어자피 돌아가실건데

5000만원이라도 건져야지라고 말하는 돌아이 포함이다.


결과적으로 친구는 코인으로 돈 날려먹고 괴로울 시간에

아버지와 남은 생애를 함께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계신건 당연한 조건이고,

코인으로 돈 따는건 당연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전문 용어로 조건부 확률을 악용하며 산다.

당연한 것을 밑바닥에 두고, 그 위에 다른 불확실성의 확률탑을

쌓는다. 그리고 그 밑에 당연한 주춧돌이 서서히 썩고 삭아

무너지면 그 위에 쌓은 조건부 확률 배팅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월 화장실 딸린 40만원 짜리 고시원에 살아 비참한 한국의 주거 난민 대학생.

아프리카 서부 내전으로 매일이 지옥인 시에라리온에서

소똥으로 움막 짓고 사는 부모 없는 남매가 보면 얼마나 부러운 조건인가?

그들은 고시원이 꿈의 집이다. 밥과 김치와 라면이 무한 리필이다.

결국 우리의 비교는 환경의 차이, 비교에 의한 감정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아이들의 인성이 더 좋다고는 말할수 없다.

그들도 고시원에서 살다보면 더 좋은 원룸을 가고 싶을테니까.

사람의 욕구는 다 비슷한 패턴을 따르며, 그 걍팍함 또한 비슷하다.


누군가는 또 반박의 화살을 던질 것이다.

너무나 뻔한 그 말.


그건 아프리카고 여긴 한국인데

부와 가난은 상대적인 건데 어떻게 그렇게

유치하게 비교하느냐. 한국에서 사는 환경에

따라 비교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 아니냐!

이렇게 욕심으로 인한 비참함은 숨기고

당당한 의지를 피력할 것이다.


그럼 이렇게 묻고 싶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당연한 것인가.

우리의 영혼은 룰렛처럼 돌다가

눈 떠보니 한국 아이로 태어난 우연 아니였던가.

부모님이 딩크족이었으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안 태어나는 것도 한편으로는 좋은 선택일지 모르겠다)


만약에 6.25때 미국이 북한 침공을 냅두고, 중국이 밀고 들어오든

신경 안썻다면? 나는 북한 아이로 태어났을 것이다.


역사와 우리 욕망은 닮은 구석이 많다.

그저 욕구하는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결정론이기 때문이다.

해도 됐고 안해도 안한데로 뭔가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의 연속 흐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 결정한 건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우리가 태어난 건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의 사물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존재한 후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그 목적성은 욕구로 발현된다.


쇼펜하우어가 이야기 하듯이

욕망과 환상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며,

그것이 사라지면 인간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욕망이라는 허울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욕망거리가 많고, 욕심도 많고, 허무도 느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욕망의 궤를 알고 의미 없는

장식에 힘을 쏟지 않고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고 살려는 의지가 강해질 뿐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아프고, 삶의 의욕도 떨어지고

자연의 어루만짐을 즐기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이건 너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얼마나 장식적인 부와 불편한 관계들에

억매여 본질을 잊고 살았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장식적인 욕망, 비교적인 욕구가 증발하는

그 자리에 진정한 허무가 자리 잡는다.


남은 생애 욕구가 밟고 지나간 푹 파인 발자국에

무엇을 알차게 채워놓고 살지가 관건이 된다.

꼭 채워 놓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감상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당연한 시간과 공간을 소비하며,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고 갈망하며 소비한다.


아래 괴인 주춧돌을 빼내어 알 수 없는

자신의 비교적 욕망, 세상의 욕망을 따라

위태로운 젠가 게임을 하고 있다.


그 덕에 당연한 하루가 칼로 위협 받고

날씨는 광폭해지고, 누군가는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스스로 죽는다.

모두 오랬동안 당연한 걸 당연하지 여기지 않은 탓이다.


당연하지 않는 것들에 끝 없는 욕망과 비교를 투영하며,

우리를 물질의 괴물로 만든 탓이다. 그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엔트로피의 비가역적인 성질을 보자면

우린 다시 안정을 찾거나 아름다워질 일이 없다.

그건 우리의 또 다른 헛된 희망이다.


더욱 광폭한 기후와 폭력과 살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자멸하고 있다.

아무쪼록 돌아온 잔인한 계절에

자기만의 은둔처 혹은

당연했던 것들의 둥지에 자리잡고

당연하지 않은 불확실성의 습격에

대비하라. 젠가는 결국 무너진다.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의 어리석음은

절대 고쳐질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세월이 지난다는 것.
알아간다는 것.
추억한다는 것.

두근대던 설레임들.
벅차던 사랑의 열정들.
욕심으로 가득하던 꿈들이
이젠 다 한점으로 모인다.

낭만과도 같던 거창함
혹은
외로움이라는 초라함.

삶이란
그저 골목 구석 까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에 몸을 녹이는 게 전부엿단 걸.

대망의 화려함..또는
초월하는 사랑의 아가페를 꿈꾸던..
그때의 상상같던 망상들은
하나둘 깨달음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이제야 서서히 평평해져간다.

삶이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종이배다.
끝없이 출렁이는 파도처럼..
사랑도 삶도 끝없이 회귀하다가
결국 한점으로 수렴하는
단순한 숙명.

2007.06.18
-블랙스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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