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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Jan 19. 2024

개똥철학; 허무주의(Nihilism) 수업

삶의 불안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던지는 철학

나는 잠시 살다가는 우주의 생체먼지다.



아주 오랫만에 글을 쓴다.


그동안 세속에 잠시 파뭍혀 살았다.


하지만 돌아보니 여전히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다시 펜을 잡는다.




마침 오늘은 비오는 수요일이다.


비오는 수요일에는 괜시리 펜을 잡고 싶어진다.




세상살이 깊숙이 하루를 기계적으로 사는 사람들과


멀어진 나만의 그 틈에서 몰래 글을 남길 때


희열을 느낀다.




비의 장막이 가두어 주는 자연스러운 고립감.


짙은 미세먼지가 가두어주는 암울하지만 안락한 방구석.


매번 나같은 히키들에게 최고의 시공간을 제공해주는


이 미친 세상에 오늘도 감사하다.




그래 그렇게 더 작렬하는 대결과 파괴가 만연하기를 바란다.


어자피 평화와 만족이라는 유전자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니


늘 그렇게 치고 박으며 대립하고 경쟁하길 바란다.


그럴때마다 나는 더 안으로 숨어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갈것이다.






오늘은 발칙한 문구를 화두로 던져 본다.




신과 우주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내가 자주 쓰는 나만의 문장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논란(?)이 예상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최적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위하는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아주 불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은 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가 원하는 걸 수천번 말하면


이뤄지고, 무한한 긍정주의 시크릿 끌어당김의 법칙을 활용하면


내 인생은 무궁무궁진한 잠재력이 폭발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텐데...


이런 불경한 소리를 하니 기분이 더러울 수 밖에.




정말 신과 우주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무정형의 운과 불운의 드라마는 매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우연과 운이 랜덤으로 교차할 때마다 늘 신과 우주가 나에게


큰 관심과 보살핌이 있어서라고 합리화하고 살텐데. 


정말 그렇다고 믿는가. 맞다 그냥 그건 당신이 믿고 싶은 것일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잔잔한 종이컵 위에 떠 있는 꽃가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그 꽃가루의 비정형 무정형


브라운 운동을 예측할 수 없다. 우린 그저 우연히 생겨나 표류하는 존재다.


아무리 물 분자와 유체역학을 빡세게 공부하고 혹시나 노벨상을 받은 들


 종이컵 위에 꽃가루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 무정형이 인생의 논리며 그 불확실성이 우리 존재의 이유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집착하는


가련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뜬금 없는 소리지만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박이 나게 해준다는 전문가들과 점쟁이들이 판치지만


그건 모두 점성술에 불과하다.


금융시장의 존재 이유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시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는 전제로 돌아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저 스케일의 싸움일 뿐.


슈퍼컴으로 무장한 메이저조차 금융시장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실수마저 한다.




그렇다. 인생도 금융시장도 모두 불확실성 투성이다.


우리는 은근히 이걸 알면서도 나는 무언가 특별해지고 싶다.


무언가 가치를 창출하며 열심히 하다 보면 큰 성취를 이루고


행복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망상같은 몽상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죽음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면


서서히 알게 된다. 커다란 욕망, 극적인 성공, 아가페적인 


사랑따위는 그저 내가 만든 희망의 언어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1000년전에도 최신 유행을 찾아 헤메이던 얼리어답터가


살다가 죽어갔다는 것을.




세상의 형태는 변해도 구석기 시대부터 각인되어온


인간의 욕구의 형태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우린 그저 존재하고 욕망하고 괴로워하고 자멸하고 깨닫는다.


이 불가분의 돌림노래를 우린 평생하다가 죽는다.


하지만 이런 걸 알려줘도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나이가 먹어보질 않아서 자기가 체험해보지 않아서


결국 결핍을 느끼고 경험해보고 당해봐야 피부로 느낀다.


그 전까지는 절대 경험할 수도 혹은 변화될 소지도 없다.


우리가 늙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나친 열정은 때로 삶을 괴롭게 하고, 내려 놓음은 잔잔하지만 삶을 침전시킨다.


매우 인간적인 삶의 모순이다.




나는 허무주의자다.


날아가는 새도 나와 대화하면 그 자리에서 자살할 수 있다.


완벽한 비관주의, 완전한 허무이론.


이 분야에서 나만큼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깊은 대화를 한들 심한 우울증 진단을 내릴 것이며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화이팅하라고 어깨를 두드릴 것이다.


아마 그 의사도 맘 한켠이 허무해 미칠 지경일 것이다.


늘 욕망과 결핍에 미쳐 분노를 분출하고 하소연하는 잉여인간들의


잡소리를 다 받아 주다 보면 정말 돈 벌기 위해 내가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그래 그냥 이야기 좀 들어주고


대충 약이나 처방해주자. 정신과 의사는 오늘도 자신의 우울함과 허무함을


숨긴 채 돈덩어리들의 푸념에 동조한다.




허무주의라고 하면 대충 이런 반응이다.


세상을 왜이렇게 비관적으로 살아.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너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의미를 발견해봐.


등등




이런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정말 당장에는 웃지만 정말 세상을 허무하게 사는 사람이고,


지금의 긍정론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갈피를 못잡고 연락이 올 사람이다.




"그래. 니 말이 맞았어. 이런일이 생길 줄 몰랐어.


이렇게 허무할때 나는 어떻게 해야해?"


이렇게 말이다. 대부분 대꾸하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말해준다.


"너가 그동안 해왔던 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잘 극복하길 바래"


가치 없는 말에는 무가치한 응대를 해주면 된다.


가치 없는 말에 너무 집착하고 살 필요가 없다.


인생을 그렇게 살기엔 너무 시간이 빨리 흐른다.




허무주의라는 다소 불경한 사상을 머리에 심고 사는 것은


정말 세상이 허무해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 여간하면 불교에서도 이를 가르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그저 인지하고 욕망할 뿐 세상은 허무함 덩어리 그 자체다.




그럼 왜 우리는 허무한데 열심히 욕심부리며 살까.


그건 눈에 보이는게 전부라고 믿는데서 온다.


우리의 눈은 걍팍해서 보이면 욕구하고


욕구하면 도파민 호르몬이 흘러 노력하게 만든다.


만약 보이는 눈만 없다면, 우리에게 명품과 비교는 사라진다.


눈이 없어지면 보이는 것이 모두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데, 루이비통이 무슨 의미며, 해외여행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추구하는 욕망은 단 하나만 남는다.


눈이 다시 보였으면 좋겠다는 욕망.




우리는 당연히 달린 두 눈을 통해 욕망거리를 만들고


비교를 시작한다. 세상은 비교를 조장하고 나는 그 무리에


들기 위해 벗고 기고 멍멍데며 아양을 떤다.


그렇게 욕망하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은 들


뇌세포는 이야기 한다.


이게 다가 아니라고 더 올라가야 한다고.


더 올라가다가 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왠지 우월함마저 느낄거 같은데 하늘을 보니 텅 비어 있다.


무언가 허무하다.


그리고 불운한 것들에 탐닉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욕망은 끝없는 만족을 바라지만,  
그 만족의 끝은 무한한 결핍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거대한 욕망의 끝은 


또 다른 결핍 더 큰 허무이다.




열심히 사는 누군가에겐 참 짜증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바래왔던 모든 것들을 부정당하는 속성이니 말이다.


하지만 허무하다고 해서 당장 아무것도 안하고 죽음만 기다리며 


살든 지금 당장 죽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허무주의를 빨리 알면 알수록 역설적으로


삶을 더 풍요롭게 살수 있게 된다.


허무주의는 한편으로는 스토아 철학과도 연결된다.


세상이 허무하다고 깊이 깨달으면


욕망이 줄고 매사에 감사하며 작은 것에 만족하는 방식에 


대해 터득하게 된다.




인생의 바닥, 혹은 죽음의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죽음과 패망의 경계에서 로고스 철학의 엄청난 진리를 깨닫는다.


그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볼만 하단 것이다.


세상 모든게 허무하니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낀다.


허무주의는 당장에는 우울해보여도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만


삶의 평안을 선물해준다. 그리고 삶을 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일주일 쫄쫄 굶은 사람에게는 따끈한 공기밥만 줘도 미친 듯이


쌀맛을 음미하며 먹는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쌀의 맛을 온 세포로 느낀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사람에게는 진수성찬을 가져다 줘도


음식쓰레기가 될 뿐이다.


우리에게는 그래서 가끔 공복과 허무가 필요하다.




허무주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욕망의 세상에


도인으로 살 수 있는 느긋함을 선사한다.


허무한 세상을 더 이상 미련없이 살게 해준다.




그럼 허무주의에 미쳐서 완전히 무기력해진


과도기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허무한 것은 알겠는데 세속을 살아야 하긴 해야하니


무언인가 욕망과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럴땐 게임이론을 생각해 보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게임이론은 사전적 의미의 그 이론이 아니다.


자신만의 게임을 하라는 것이다.




자 게임이론.


세상의 관계와 이득은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항상 누군가가 위에 있고, 나는 최적의 게임을 해야하고


나는 항상 승리해야 하고, 남보다는 더 노력해야 하고,


남들만큼은 살아야 하고. 내 나이에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하고


이 모든 것을이 허무한 게임이론이다.




그 누가 정했는가. 그 누가 원했는가.


모든 것은 나의 문제다.


1만원짜리 와인을 마시나, 100만원 짜리 와인을 마시나


맛이 얼마나 다를까. 그건 그냥 브랜드와 역사와 내가 알수 


없는 허풍의 차이다.


아파트가 있는 친구가 부러운건 그저 나의 욕망이다.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도 오로지 나의 몫이다.


하지만 아파트가 없거나 승진을 못했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실패했다고 그렇게 내가 생각할 뿐이다.


세상은 불공정한 게임에서 늘 당신은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졌을 때는 병신이라고도 안한다. 통계에서조차 사라지니까.




나만의 게임을 하라.


남과의 게임은 지양하라.


누가 돈을 많이 벌건, 승진을 하던


누가 집을 샀던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다.


구석기 시대에도 누구 동굴이 더 살기 좋은지


비교하는게 인간이다. 얼마나 미개한가.


신상 화살이 맘모스 잡기에 좋다고 자랑하던


네안데르탈인으로 살고 싶은가.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자신만의 게임을 한다.


더 이상 허무해지지 않을만한 가치를 위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을 위한 게임만 한다.




인간의 어정쩡한 포지션은 결핍 없이 


살수 없게 설계되었기에 티벳까지 600키로 미터를


오체투지로 간다하더라고 결국 무언가를 하며 살아야 한다.


종교수행자가 되거나 삶에서 깨닫고 살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삶은 계속되고 허무는 늘 다시 찾아온다.




그래서 늘 자신이 잘 아는 게임, 자신이 재미있는 게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임을 하면 된다.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한 게임을 하는 사람은


누가 모라든, 누가 비난하든, 누가 부러워하든


아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제의 나보다 더 발전했는지만 비교하며


허무한 삶에 내가 행복해 질수 있는 게임에만 몰입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의 게임 루트가 만들어낸 


독보적인 나만의 길로 나의 진짜 인생을 살게 된다.


내일 당장 죽는 순간에도 아쉽지 않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욕망한다. 괴로워한다. 포기한다. 살아간다.


그 누가 알려주었는가 운칠기삼이 아닌 운구기일만 남은


우리의 이 어정쩡하고 허무해져가는 인생을.




허무의 심연에서 바닥에 발을 디뎌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면,


남과는 상관 없는 나만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게 어떤 세상이라도 웃으며 살아 갈 수 있다.




우린 애초부터 삶이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좀 어설프고 실수하고 망해도


인생을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아무것도 절망할 것이 없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볼 용기가 생긴다.




왜냐하면 어떤 날들의 풍경과 깨달음이


죽음의 순간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건낼지


가봐야 그 의미를 모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망하는 삶은 화려하지만 부자연스럽고,
내려놓는 삶은 초라하지만 감사하다.
허무는 마음의 무소유이며, 거듭남의 시작이다.

-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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