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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스완 Feb 14. 2023

허세; 내가 페라리를 사지 않는 이유

소유와 존경의 희미한 간극에 관하여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저녁 by 블랙스완


어린 시절부터 크게 가난하지도
전혀 부유하지도 않게 살아왔지만
거친 투자 인생을 거치며 억지로라도
가끔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명품이나 사치에 취미가 없던 나는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인사이트를 축적해
이룩한 방대한 투자수익을 즐겁게 쓰지도 못했다.
돈을 쓰는 것보다 돈이 불어나는 속도에 더 쾌감을
느끼던 치기 어린 시절이었다.

한창 투자에 미쳐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의 통장에는 이미
오로지 과외와 투자로만 일군 수천만 원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에이치엔티'라는 희대의
주가 조작 종목을 운 좋게 올라탄 대학생은
반년도 안돼 3억이라는 큰돈을 만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꽤 재미가 있어 나중에 자세히 올리겠다)

호기롭게 200만 원짜리 도시바 노트북을 친구들 앞에서 일시불로 결제하는 담대함을 보이며 허세는 하늘을 찔렀다.
물론 몇 달 만에 자산은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패션과 트렌드에 둔감하고 투자와 인사이트에만
미친 2030대에 나 역시 가장 관심이 있던 것은
멋진 자동차였다.
투자에 한창 미쳐있을 때 나의 목표는 페라리였다.
일본에 페라리 거지들이 꽤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거친 풍파를 겪은 투자자에게 최고의 선물.
남자의 가장 비싼 장난감. 페라리를 사는 것은
내 투자 라이프의 정점을 찍는 이정표라 생각했다.
지오다노 니트 하나 사는 것도 아까워 벌벌대던 대학생은 뚜껑이 열리는 빨간 페라리를 타고
동해 삼척의 파도가 부딪치는 멋진 해안도로를 타고 고속으로 질주하는 CF 같은 꿈을 꿨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취업을 하고
30대에 사업을 시작해 더 열심히 살고

어느새 40대가 되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페라리가 없다.

그동안의 내공에서 나온
운과 실력의 교묘한 조화 덕분인지
지금은 페라리를 실컷 사고도 남을
자산을 일궈가지만 난 페라리를 사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별로 사고 싶지가 않아 졌다.

수년 전 페라리 매장에만 몇 번을 가서
상담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진자 이번엔 결심하고 사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 40이 넘어가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에 나온
명제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다.
이른바 페라리의 역설이다.


당신이 멋진 차를 몰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보지 않는다.
당신의 멋진 차에만 감탄할 뿐이다.
아무도 당신의 물건을 보고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내가 페라리를 사고 싶었던 것은
자기만족 혹은 자기 성취감의 극치를
맛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허세다.

자기만족이 타인의 존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투자자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과
페라리를 사는 것과 별 관련이 없다면
페라리는 그야말로 잠깐 즐거운
비싼 장난감으로 전락해 버린다.
몇 번 타지도 않는 불편한 보석을
차고에 넣어둔 채 불편한 고지서만이
쌓여갈 것이다.

남들이 '와'하며 페라리의 멋진 모습에 빠져
나라는 인간은 페라리의 아름다움에 가려
투명인간이 된다면 나는 자기 만족감이라는
허울에 더욱 가치를 부여하고 자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젊은 시절에는 페라리가 나의 가치와 존경을 위한
상징적 물건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페라리는 오히려
부를 여전히 어설프게 아는 치기 어린 졸부의
증명서로 여겨질게 뻔해 보인다.
"나는 나름 자수성가했고 졸부가 돼서
페라리를 샀으니 부럽지"하고 허세를
부리는 꼴이다.

젊은 시절의 허세는 과해도 모자란 누군가의 부러움을 산다.
나이 들어 철없는 허세는 자기 상실감의 표현에 불과하다.
허세를 부리는 것에도 쓸데없는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탓이다.

페라리를 사지 않고도 여기저기서 풍족함의
증거를 느낀다면 굳이 뽐내기 위해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게 된다.
언제든 살 수 있다면 사지 않게 되고
언제든 살 수 없다면 소비해 버리는 게 인간이다.

몇 주전 아버지가 대장암 진단을 받으시고 함께 대학병원에 찾아갔을 때, 

입원실이 꽉차 자연스럽게 가장 비싼 1인실을 예약하면서, 장기전이 될 투병 생활에 대해 진료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됨에 감사했다.

2주간의 영국 스코틀랜드 출장을 갈 때
1000만 원 가까이 되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편하게 가며,
지인들에게 주고 싶은 면세품을
가방 가득 담을 수 있으며,
남들 회사 다닐 시간에 미세먼지 없는 공기에
가고 싶었던 싱글몰트 위스키 양조장을
넉넉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적 여유에
감사함을 느꼈다.

나이가 들어 알게 된 부의 감사함은
페라리가 아닌 내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찐 몸을 구겨 넣은 배 나온 아재가
빨간 페라리에서 끙끙 데며 허리 아파하며 운전을 한들 그 만족감은 생각보다 짧고
그 누구에게도 존경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문득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대출을 당겨서 허세를 부리던
20대 청년에게 진심으로 말했던
거부 서장훈 씨의 말이 생각난다.


"나이 들어 돈이 많아 가장 행복한 이유는
무엇을 마음껏 살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나는 화려한 아침 일출보다
서글프게 어슴푸레 잠기는
저녁노을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노을이 좋다고 해서
나만 보겠다고
방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과 감사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매일 볼 수 있는 노을이
가끔은 흐린 구름에 가려져
볼 수 없다면,
맑은 날에 한 번 더 쳐다보며
감상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노을은 구름이 한 점 없을 때보다

적당히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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