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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Oct 29. 2021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_길을 떠나다

4N년차 여자사람_젊은 날의 도전

시간을 거슬러 2001년, 20년 전으로 올라가 본다.


200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그때 당시 벤처붐에 편승하여 설립된 IT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 직원 모두가 30대 초반이었고 대학 선배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어서 어렵지 않게 잘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었다. 또 같은 날 입사를 한 전략기획팀 ‘오빠’도 든든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TMI이지만 그 ‘오빠’와 비밀 사내연애도 회사에 가는 즐거움의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한 프로그램들에 대한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었고, 투자를 해 주었던 사람들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회사의 경영이 많이 안 좋아져 월급이 2~3개월 밀리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쯤 그 ‘오빠’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아직은 어렸던 내게 힘들었던 상황이었고 급기야 2001년 중반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쉬기로 결정하고 퇴사를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사회생활이 1년 반 만에 끝났다.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 집은 2007년 IMF 이후 빚이 많이 늘어나서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내 용돈 일부만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 가져다 드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하는 게 순리였는데, 아니 그전에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퇴사를 했어야 하는 게 순리였는데 왠지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책 없이 백수로 전향이 된 상태였다. 부모님이 눈치를 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냥 혼자서 부담이 되었고, 반면에 왜 나는 돈을 벌어 내가 하나도 쓰지 못하고 이래야 하나 하는 불평도 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있는 친구의 집으로 여행을 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그 친구가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는 말을 흘리듯 했다.

어학연수?

그때까지 내 주변에는 어학연수를 가 본 친구들이 전무했고 대학생들 사이에 막 어학연수 붐이 일기 시작했던 상태이며, 나로 말하자면 제주도도 한번 못 가본,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촌년이었다. 물론 어느 나라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근데 갑자기 어.학.연.수.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버렸고 그때부터 검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때쯤 퇴사한 회사에서 밀렸던 월급과 퇴직금이 목돈으로 들어오면서 나의 계획은 급 물살을 탔다.


그럼 나는 그전에 영어를 좋아했었나? 전.혀.

고등학교 기본교육과 대학교 1학년 때 영어회화 수업을 들었을 뿐 영어에 대한 취미도 없었고 재미있지도 않았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토익을 따로 공부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그때 당시 나에게 어학연수는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나 보기 위한 핑계였으며, 갑자기 생긴 호기심이었다.


검색 결과 나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남부 해안가 작은 도시로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정했다. 돈도 많지 않으면서 필리핀이나 호주도 미국도 아닌 물가 비싼 영국이라니.

그래도 로열패밀리가 있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대신 런던은 진심으로 물가가 말도 안 되게 비쌌기 때문에 지방의 작은 소도시로 결정을 하고 신청서를 접수하고 수강 허락서를 받고 모든 밑 작업을 마무리한 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생각도 못했던 소식에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지만 나는 이미 8개월치 수업료와 2개월치 하숙비를 다 보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억지 허락을 받았다. 물론 아직 송금 전이었기는 하지만.


며칠 후 동네 포장마차에서 친한 고등학교 선배 언니와 나의 어학연수에 대해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참을 얘기하고 돌아오는 내게 엄마는 TV를 보라고 하셨다. 영화를 보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다. 건물에 비행기가 날아가 박혀 폭파되는 장면이었다. 술기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난 내 방으로 돌아가 잤고, 다음날 아침 세계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911 테러였다.


그전까지 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딴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그 며칠 후 나는 8개월치 수업료와 2개월치 하숙비를 송금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환율이 막 요동을 치고 있었다. 테러의 영향으로 달러 환율은 많이 떨어졌지만 반면에 유료와 파운드는 올라갔고 그것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후 가슴 졸이며 은행을 찾아가 금액을 송금하고 내 손에 남은 금액은 구십몇만원이 전부였다. 비행기 표는 그 전에 사놓았기 때문에 이 구십몇만원은 그때부터 영국에 들어가서 당분간 살 나의 용돈이 되는 것이었다. 영국은 학생비자로 들어가면 주 20시간의 노동을 할 수 있었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일을 해서 생활비를 충당할 생각이기는 했으나 내 손에 남은 돈이 예상보다 너무 작아져서 당황이 되기는 했다. 3개월 차부터는 하숙비도 그때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5~60만 원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집에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고 뒤로 꿍쳐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어서 우선 가보자 결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가기 전까지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전에 알바를 했던 곳에서 짧은 시간으로 일을 했다. 그 당시 시급이 2천원 남짓이었고, 이런저런 준비 때문에 시간을 길게 일할 수 없었기에 큰 도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만 몇만 원 몇천 원도 그 당시의 나에게는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추석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적인 그날이 다가왔다.

2001년 10월 6일
처음으로 인천국제공항을 갔으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으며, 처음으로 한국 땅을 벗어났으며,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본 그날.


아침 비행기에 새벽부터 분주했고 엄마와 할머니와 집에서 이별을 나눴으며 공항에 같이 와 준 아빠와 남동생, 그리고 그의 절친과 가볍게 아침을 먹고 수속을 진행한 후 이제 혼자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그 길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설레기만 했었다. 그냥 모든 게 좋았다.


근데, 비행기가 출발하는 그 순간 무엇인가 울컥하면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 잘할 수 있을까? 거기서?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인생의 커다란 터닝 포인트이자 역사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액자에 고이 박제되어 있는 그날의 비행기 >



#어학연수 #젊은날의여정 #911 #우물안개구리벗어나기 #내인생의터닝포인트 #추억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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