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오자마자 우리 집부터 들러 선물 보따리를 풀고 가는 엄마. 딸을 위한 크림, 손주를 위한 장난감, 사위를 위한 코트... 난 “엄마, 왜 이런 데 돈을 써요~" 하면서도 마다하지는 않는 딸이다. 엄마는 사위의 선물을 사느라 가진 돈을 탈탈 털었다. 아끼며 사느라 옷 하나 안 사 입는 딸 덕분에 패딩 하나로 겨울을 난 사위가 안쓰러워 보인 모양이다.
엄마는 20년 차 화가다. 파리로 유학을 다녀왔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의 파리행도 아트 페어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사진을 보여준다. 고흐의 무덤 앞에 서 있는 엄마,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이 웃고 있었다. 난 엄마가 이렇게 자유로워 보일 때가 좋다. 남들이 보기엔 팔자 좋은 여자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알고 있다. 엄마가 얼마의 피나는 노력 끝에 지금의 인생을 쟁취했는지.
댕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데, 문득 엄마가 우릴 키울 때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엄마, 내가 몇 살부터 유치원에 갔지?”
“6살에 갔나 7살에 갔나 그랬을걸.”
“그럼 엄마가 집에서 한글을 가르쳤어?”
“어머 한글이 다 뭐니 천자문까지 다 가르쳤는데. 생각 안 나?”
난 새삼스레 감탄했다. 지금의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렸을 때 주산 신동이었고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 대학까지 간 똑똑한 여자였던 우리 엄마는 어느 날 아빠와 결혼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산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와 동생을 낳아 길렀다.
“너무 답답했겠다. 그 시골에서.”
“말해 뭐하니. 거기선 뭐 할 게 있어야지. 아침에 일어나면 너희하고 복작거리고, 너희 밥 먹이고 나면 놀리고 공부도 시키고, 뭐 그런 거지. 거기선 숨통 트일 때는 장 보러 나갈 때뿐이었어.”
물꼬를 트자 엄마는 그 시절의 기억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40년이 다 되었지만 잊히지 않는 생생한 기억.
“네 동생 가져서 배가 남산만 해서도 너를 매고 다녔었는데, 둘 다 나오니까 혼자서 데리고 못 다니겠더라고. 그때 정말 힘들었지. 그래서 하루는 너네가 자고 있어서 두고 후딱 장 보러 갔다 왔는데, 돌아와 보니 네 동생은 왕 울고 있고, 넌 턱 괴고 창밖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더라고.”
이 얘기는 언젠가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들었을 때와 느끼는 감정이 달라졌다. 그 전에는 자다가 일어나서 엄마의 부재에 당혹스러웠을 네 살짜리 아이의 심정을 생각했다면, 이제는 아이 둘을 놓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마음이 된다.
엄마가 결혼했을 때의 나이 스물다섯. 여자는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아빠의 순수함이 좋아 시골까지 따라가 살았다는 엄마. 하지만 아빠는 일할 줄만 알았지 자상한 남편은 아니었다. 엄마의 말로는 매일 야근에 술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말 그대로 산속에 처박혀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은 외딴곳에서 엄마는 리얼 독박 육아 중이었다. 20대 중반의 여자가 그 당시 감당해야 했을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울고 있는 두 딸들을 안고 같이 울어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장터에서 아이 하나를 등에 매고 손에는 하나를 걸리고 장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 든 젊은 엄마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안쓰럽다.
한 가지 기억이 있다. 그 산중에 살던 시절, 난 좋아하던 이불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누워 있었다. 밤이었고, 엄마와 아빠가 크게 다퉜다. 엄마는 늘 입던 하늘색 면 코트를 입고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불속에서 ‘엄마가 나가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자 내 기억은 거의 맞았다. 엄마는 육아와 아빠의 술에 지쳤다. 엄마는 아빠 지갑에서 돈을 꺼내 들고 집을 나가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이미 말했지만 거긴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새 옷 하나 사지 않았다. 애당초 아이의 옷을 사 입힐 여건이 되지 않았다. 큰집에서 물려받은 옷을 입히거나, 직접 만들어 입혔다. 엄마 본인도 옷이란 걸 사 입은 적이 없다. 시장에서 5천 원짜리 치마 하나 사 입을 때도 손을 벌벌 떨었다. 아빠가 가져다준 월급을 악착같이 모았고, 내가 7살이 되던 해 그 산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산중 시골에서 읍내로 이사 나온 후, 엄마는 뭐든 닥치는 대로 배웠다. 운전, 영어, 중국어, 수영, 기타... 엄마는 그렇게 그 암흑의 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중학교에 갈 무렵 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 은행에서 일했고, 옷장사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 때 전공을 살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피나는 노력 끝에 나이 50에 홀로 파리로 유학을 갔다. 누구도 엄마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 나이에 무슨 유학이냐고 주변에서 비웃을 동안, 엄마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엄마는 평생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우리에게도 최선을 다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고, 돈벌이도 했고, 평생의 일도 찾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 늘 한계는 있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엄마는 더 높이 날아올랐을 거다. 안타깝게도 엄마가 시골에서 우리만을 키우며 지낸 시간이 6년이다. 그러고도 10년 이상을 엄마는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남편의 밥을 챙기고, 틈틈이 자식들, 손주들의 밥까지 챙겨가며 40년간 엄마로 가족에 '봉사'하고 있다.
가족들은 엄마의 희생 위에 존재해 왔다. 공기를 마시듯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엄마의 헌신.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돼보니 그 희생과 헌신은 자신을 포기하는 수준임을 알겠다. 내가 딸로서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책임인 육아를 엄마와 나눠가지지 않는 것. 물론 동생의 아이를 키워준 바 있던 엄마의 선언이 있기도 했다. 더 이상 손주를 양육하지 않겠다고. 당연한 결정이다. 엄마가 오랜 기간 두 딸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로 살며 자신의 인생을 유예해온 것으로 족하다.
이제 예순다섯, 엄마의 인생을 응원한다. 엄마가 가족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더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