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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독서법

완벽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by 허필선

얼마 전 독서모임에 가서 얘기를 하던 중 통계학과 학생과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을 얘기해주며 이 책에 있는 얘기 중 어떤 연구결과에서 사람들은 평균 8시간을 잘 때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 친구는 책 좀 볼 수 있냐고 하면 그 책을 유심히 보며 얘기했다. “제가 통계학과 다니는데요. 이 연구 결과가 맞을 수도 있지만 우선 책 속에 실험 인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부족하네요. 정확한 통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실험집단이 얼마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이 책의 설명만으로는 정말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인지는 알 수는 없네요”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라는 대답을 하고 말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솔직히 난 그 학생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 학생의 통계에 대한 지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책이라는 것이 어떤 통계자료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 통계 내용 전체를 가지고 올 수는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책을 참 바르게 보고 있고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책을 볼 때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책 속에 나온 얘기라고 해서 얼마나 신빙성 있는 얘기일 수 있을까? 많은 책들이 수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의심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아웃라이어’에 소개된 ‘1만 시간의 법칙’만 해도 그렇다. 과연 누구나 1만 시간 연습을 하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일까? 수년간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던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1만 시간의 재발견’ 책 47p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운전, 테니스, 파이 굽기 등 무엇이 되었든 일단 여러분이 이처럼 ‘만족할 만한’ 수준, 기계적으로 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발전이 멈춘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종종 오해를 한다. 지속적으로 운전을 하거나 테니스를 치거나 파이를 굽는 것이 일종의 연습이라고 보고, 그 일을 계속하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속도는 느리겠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리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20년 동안 운전을 한 사람이 5년 동안 한 사람보다 분명코 운전 실력이 나을 것이라고, 20년 동안 진료를 한 의사가 5년 동안 한 의사보다 분명코 실력 있는 의사일 것이라고, 20년 동안 교편을 잡은 선생이 5년 동안 잡은 선생보다 분명코 유능한 선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일단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실력과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처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이후의 ‘연습’은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20년 동안 그 일에 종사한 운전자, 의사, 교사가 불과 5년 일한 이들과 비교해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실력이 그보다 못할 가능성이 있다. 왜 그럴까? 바로 이런 기계적인 능력은 향상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경우에 서서히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안데르스 에릭슨 Anders Ericsson은 1만 시간보단 중요한 것은 자신의 콤포트 존을 벗어나는 고도로 집중된 장기간의 연습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시간에 있어서도 7천 시간에서 1만 2천 시간은 시간은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정설이라고 여기고 있는 연구결과도 때론 오류를 범하고 있다.


‘행복은 유전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인철 교수의 ‘굿 라이프’에서는 이 말에 대한 오류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1996년 '심리 과학'이라는 매우 권위 있는 저널에 '행복은 우연적 현상이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데이비드 리리켄과 오크 델리건이라는 두 명의 미네소토 대학 심리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이다. (중략) 리켄과 텔리건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된 일란성 쌍둥이들의 행복을 9년 간격으로 조사한 자료를 분석할 수 있었다. (중략)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복 간의 상관이 높다는 점은, 개인 간 행복의 차이가 유전적 특성에 의해 대부분 결정됨을 시사한다. 여기까지는 논문에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결과를 해석하면서 논문의 끝부분에서 매우 유명한(악명 높은?) 발언을 하게 된다.
It may be that trying to be happier is as futile as trying to be taller.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키를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부질없다.)
그들은 마지막 주장이 과장을 넘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3년 만에 이를 정정하는 책을 발간하게 된다. p58
책 서문에서 리켄은 '이제 이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우리의 그 비관적인 주장은 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뿐더러, 명백하게 틀린 주장이다. (For reasons that will become evident, that possimistic conclusion is not impelled by the data and in fact, I believe, it is wrong)'라고 분명하게 적음으로써, 자신의 발언이 일종의 '오버'이자 오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책을 내는 이유가 이런 자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a chance to set the record straight)'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61p’
이렇듯 국제적으로 유명한 서적 혹은 연구결과에서도 수많은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떠한 책에서는 1시간에 책 1권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그것을 교육과정으로 만들어 수백만 원에 강의료를 받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일부의 책들은 1시간 미만에 읽기는 하지만 그것은 충분한 독서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고 이미 비슷한 류의 책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노력도 없이 수백만 원의 돈을 내고 그런 기교들을 배워서 책을 1시간 안에 읽을 수 있을까? 혹시나 그렇다고 한들 그 내용을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이런 잡기교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내 유명 독서법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해마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정보라 판단되는 것이 있으면 기억 속에 각인을 하는데 반복하는 것은 네 번이면 충분하고 네 번 이상의 반복은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정보를 네 번 이상 입력하고 또 입력하면 해마가 짜증을 낸다’
도대체 이런 어처구니없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하던 공부법은 모두 다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세종대왕의 독서법도, 정조의 독서법도 정약용의 독서법도 모두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해마가 짜증을 낼 수 있다는 근거는 그 어떤 뇌과학 서적이나 심리학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연구결과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개인적 시각을 어떠한 논리적 뒷받침도 없이 책 속에 명기하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된다. 책에 대해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특정 일부의 사람에 적용되는 것이나 혹은 잘못된 지식의 남발을 경계해야 한다. 책을 썼다고 해서 작가라는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일까? 그의 지적 수준이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일까?


책을 읽으면서는 항상 의심을 해봐야 한다. 작가가 하고 있는 얘기가 정말 정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작가도 그 책을 내기 전에는 작가가 아니었다. 책 한 두 권을 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자기 위대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요즘과 같이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책들이 남발되고 있는 현제 시대에서는 비판적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 자신만의 잣대를 세우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서 책을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비판적 책 읽기가 절실히 요구된다. 비판적으로 책을 읽지 못하게 되면 작가의 사상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작가의 사상이 옳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사상이 될 수는 없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정보를 가지고 와서 나의 사상과 비교 검토의 과정을 통해서 나만의 기준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노자가 공자의 말이 모두 옳다고만 바라봤다면 결코 도덕경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고 도교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사상이 옳다고만 바라봤다면 결코 철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이 옳다고만 생각했다면 현재의 철학 사상은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전에 사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만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하고 현상을 파악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항상 비판적 사고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기존에 있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인식하고 나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내서 불편함을 편함으로 바꾸려는 노력 그것으로부터 창조는 시작된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사람, 나만의 시선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쫓아가는 소비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생산자가 되기 위해선 불편함을 느끼는 비판적 사고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답을 찾아내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삶이고 일등이 아닌 일류, 창조가가 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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