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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선 Jan 09. 2024

나는 왜 인도로 갔는가?

인도는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허황후 이야기

내 이름은 허필선, 본관은 ‘김해 허(許)’씨다. 어릴 적 어른들이 한 얘기가 있다. “우리 본관은 인도인으로부터 왔어.” 어릴 적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이다. 인도가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 허황후(許皇后)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이랬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가락국(금관가야) 시절,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가 한반도로 건너왔다. 공주가 한반도에 도착할 때, 수로왕(首露王)은 친히 배가 오는 곳까지 행차해서 배를 맞이했다. 그렇게 인도의 공주 허황후는 수로왕의 아내가 되었다. 수로왕은 허황후를 많이 아꼈으며, 둘 사이에서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허황후는 두 명의 아들을 자신의 성인 허씨(許氏) 성을 쓰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수로왕이 동의했고, 본관은 수로왕의 본관인 ‘김해’로 했다. 그렇게 ‘김해 허’씨가 탄생했다. 지금도 ‘김해 김’ 씨와 ‘김해 허’씨는 동본으로 여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릴 적 식구들이 우리 본관이 인도인으로부터 왔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인도라는 나라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고, 해외를 나갈 수 있다면 꼭 인도로 가보고 싶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는데, 같은 학과 친구가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팔에는 뭔가를 두르고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분명 같은 친구인데, 방학 몇 개월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나타났다. 심지어 말투며 태도까지 달랐다.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네 방학 때 뭔 일 있었어? 뭔가 많이 변했어.”

“그래 보여? 나, 인도 갔다 왔어.”

“우와. 인도? 팔에 찬 것도 인도 거야? 옷도?”

“어. 인도에서 산 거야. 좀 달라지긴 했나 봐. 생각하는 게 예전과 달라지긴 했지.”

“인도는 어때?”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우리나라하고는 아주 다르지. 못살지만, 훨씬 여유롭고 자연과 가까운 삶이 있는 그런 곳?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가봐야 알아.”


그때부터 며칠간 그 친구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강의가 없을 땐 인도 얘기를 물어보고, 저녁이면 술을 사주면서 물어봤다. 인도에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친구가 다녀왔다고 하니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친구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는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나라와도 다른 신비의 땅 그 자체였다. 길거리에는 요가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날이 더워서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많고, 소가 차도로 돌아다니고,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움직이는 곳이라고 했다. 분명히 친구는 인도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해외 한 번 나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친구가 하는 얘기는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며칠간 듣고 나니 인도에 더 가고 싶어졌다. 아니 꼭 가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내 본관의 시작점 인도에 나는 꼭 가야만 했다. 


인도에 가야 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다. 부서는 해외 CS팀으로 발령 났다. 마냥 좋았다. 해외 관련 일을 하게 되면, 인도에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부서에 가니 어느 지역 담당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같이 입사한 동기는 유럽 담당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아시아를 담당하고 싶다고 했다. 인도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외 CS팀의 아시아 담당으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해외에서 들어온 수리 건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도 찾아서 제시하고 부품 발송을 하는 일이었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어느 날 상사가 물었다.


“너 인도 갈래?”

“예? 예!”

“한 2년은 갔다 와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저 꼭 가고 싶습니다.”


내용은 이랬다. 해외에서 문제가 생기면 한국에서 제품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출장을 가야 하는데, 출장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제품 수리를 할 수 있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현지에서 체류하는 것이 낫겠다는 논의가 있었고, 그래서 상사가 나에게 물어본 것이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그런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입사를 하고 단 3개월 만에 회사 정책이 바뀐 것이다. 나는 정말 가고 싶었고, 상사는 괜찮겠냐고 걱정하듯 물었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몇 년간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결국,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입사 6개월밖에 안 된 직원이 그것도 새로운 정책의 첫 시도로 인도에 나가게 되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내가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였을까?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인도에 도착해서 내가 하는 일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제품은 자동자수기로 7~8m 정도의 천에 컴퓨터 자수를 놓는 제품이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만들거나 꽃 같은 형태를 옷을 만드는 천에 세기는 그런 자수기였다. 제품의 특성상 자수 공장은 도시 중앙보다는 변두리 또는 시골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시골이 공장 임대 가격이 싸고, 인건비가 저렴하고 대도시에 있을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품이 있는 공장에 가기 위해서는 대도시가 아닌 시골로 가야 했다. 북부, 중부, 남부를 비행기를 타고 가서는 다시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더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골에 있는 공장에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하면 공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인도인들은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고, 나는 반대로 인도인이 신기했다. 시골에 있는 공장 직원 중 상당수가 태어나서 외국인을 처음 본 사람이었다.

공장에 들어가면 수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태어나 외국인을 처음 보니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제품을 다 고치고 나면 으레 사장실에 들른다. 문제에 관해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을 처음 본 사장은 쉽게 놔주지 않는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던 시절, 공장 사장과의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고 나면 머리가 어질했다. 때로는 제품을 고치는 시간보다 사장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길기도 했다. 


시골에서 시골로 돌아다니고, 제품 조작원, 제품 관리자, 공장 관리자, 사장까지 하루에도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영어뿐만 아니라 인도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힌디어를 조금씩 배우고 나니 인도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고, 인도인끼리 하는 얘기를 조금씩 알아들으면서 인도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도라는 나라는 그렇게 쉬운 나라가 아니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문화와 행동 양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도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나라 그곳이 바로 인도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 몇 년이 흘러 이직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인도로 나가야 했다. 최소 2년을 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인도로 향했고, 결국 2년 넘게 인도에 다시 갇혀버렸다.

인도에 상당히 오래 있었고, 많은 지역을 다녔지만 인도는 아직도 어렵고, 어떤 나라라고 설명하기 힘들다. 누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인도 얘기도 잘 하지 않는다.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국민성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다. 심지어 생김새도 다르다. 어쩔 땐 하나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이상할 때도 있다.


인도는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가 모호한 그런 곳이다. 상식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상식이 아니게 되고, 알았다고 생각하면 다음 날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그런 곳이다. 정의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곳이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현상을 보고 대응해야 하는 그런 곳이다. 누군가 인도를 잘 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믿지 마라. 인도는 그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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