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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루 Dec 23. 2021

사라져서 해소되고, 위로받을 순간들

[사라지는 것들]


 늘 그대로 존재할 것 같은 기대가 어긋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리거나 소멸되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책 《사라지는 것들》.

<파리에 간 사자>로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았던 베아트라체 알레마냐 작가가, 이 책으로 2020년 프랑스 아동문학상 그림책 부분을 수상했다.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 <어린이>에서 느꼈던 시적인 감성과 상상력이 독특한 페이지 구성으로 더욱 빛나는 그림책이다.




묻어날듯한 터치와 따뜻한 색채의 그림으로 이렇게도 진하게 다가온다.

엷은 트레이싱지에 가려진 그림과 짧은 글이 나타날 때의 그 기분은 어떻고!


살짝 비치는 찻잔에서 몽글 피어나는 온기가 따뜻하다 싶더니, 다음 장면에선 따뜻한 김이 사라진 찻잔이 덩그러니 나를 올려다보며 '이것 봐 한때의 뜨거움이 영원하진 않아. 그렇지?' 말을 걸어온다. 뜨거움이 사라져 다행인 걸까, 다 식어버려 아쉬운 걸까. 작가가 살짝 비틀어 유도하는 '시선의 전환'에, 독자를 페이지 넘김의 행위로 직접 참여시키는 매력적인 그림책이다.

오래도록 뜨거울 것만 같던 찻잔의 김이 날아가듯, 늘 선명하게 놓여있는 탁상 위 사진도 언젠가 색이 바랠 것이라는 걸 아는 우리. 곧 나타날 그림을 상상하며 마냥 즐거운 아이들 머리 위로 마음이 아득해진다. 책장을 넘길수록 작가가 보여주려는 '사라짐'에 대한 시선은 더 먼 곳에 있음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얘들아 들어봐~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슬픔만 있는 게 아니란다. 네가 움켜쥐고 있는 사소한 불안, 지금 너를 흔들고 있는 어지러운 마음, 가벼운 상처도 모두 곧 사라질 거야.


"그게 언제인데요?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첫째에게, 어릴 적 '영원히 엄마를 미워할 거야!' 외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잔뜩 몸살 나 고생하던 날 밤, 오늘은 그림책을 읽어줄 수 없다는 말에 외친 한마디를 기억할까.


"그때 기억나? 엄마가 그림책 한 권 꺼내자마자 그 '영원'은 사라졌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내게 영원한 시간이, 누군가에겐 찰나의 순간이 될 수 있는 거잖아. 끝없이 괴로울 것 같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휙 뒤집혀 웃게 될 수도 있고. 그러니 불안은 가벼운 웃음으로 날리고, 작은 상처쯤 사라지지 않은들 어때?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지금 네 마음을 소란하게 괴롭히는 일들을 돌아보렴. 당장 움직여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온종일 낙엽을 쓸고 있는 청소부의 마음이란 짐작만 하기에도 그 끝을 알 수 없어 한없이 반복될 괴로움이겠지.

어때, 사라져 슬픈 것만은 아니지? 누군가 애타게 기다리는 사라짐도 있는 거란다.




 사라져서 '해소'되고 '회복'되는 삶의 다른 면들을 잊지 않게 다독여주는 페이지들을 넘기다 보면, 마치 내 마음의 검댕이가 사라진 듯 되찾은 가만한 마음이 채워진다. 사실 가까운 곳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가, 누군가가 함께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과 위로까지 완벽한!


아이들에게도 내게도 들려주자.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단다.
변하기도 하고,
휙 지나가 버리지.

사라짐을 전제로 하기에 귀한 순간들.

이 또한 사라질 것을 알기에 조금 덜 괴로울 수 있는 순간들을 기억하려 애써 본다.

다음엔 어떤 장면과 마주할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지만 마음의 준비 따위 필요 없이 예상 밖의 그 순간을 그저 만나면 된다. 산책하듯 천천히 건네는 베아트라체 알레마냐 작가의 물음표를, 많은 분들이 함께 들여다본다면 좋겠다.



함께 읽던 아이가 자리를 떠나고, 혼자 조용히 앉아 페이지를 다시 넘긴다.

엷고 불투명한 종이를 슬쩍 들어 올려, 내게 잠시 머물고 있는 것과 곧 사라질 것들을 가늠하며. 곧 해가 바뀔 12월이지만 사라질 것을 아쉬워 말고 이제라도 '처음'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 지지부진했던 과거의 나를 찻잔의 온기처럼 날려버리고, 내 '지금'과 마주 앉아 다음을 이야기하게 해 준 그림책을 만나 다행이다. 이제 내가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차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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