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루 Jan 01. 2022

결국 '자기 발견'이 답이다.

[전나무가 되고 싶은 사과나무]


작년 겨울, 제라늄의 세계를 알고 말았다.

애써 한 녀석을 고르고 골라 새로 들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꽃망울을 달고 도착했던 꽃대들이 검게 마르고 새로 올라오는 꽃대마저 맥을 못 추는 게 아닌가. 배송될 때 보온팩에 잘 감싸서 세심히 왔건만.. 오자마자 분갈이까지 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제라늄 초보자는 알 길이 없어 애 태우던 아이. 곧 뿌리 파리가 발견되어 흙을 털어내어 말리고, 약을 뿌리고 살린 정성이 아까워서라도 꽃 없이 계절들을 버텼다. 새롭게 겨울이 시작되니 이 녀석이 올해는 가망이 있나 가늠하며 새 화분을 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여느 때처럼 물을 주다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세상에! 굵은 네 줄기 끝에 모두 꽃대가... 작은 망울망울 조심스럽게 달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순간, 기특함과 짠함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바로 며칠 전 친구에게 보여주며 '새로 사야겠지?' 이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애를 쓰며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침 해와 저녁 해가 다르게 피워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 동안,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연결해주는 끈이라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멈춤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꽃 덕분에 설레는 마음이 배가 되어 오후를, 내일 아침을 기다리게 된다. 온 힘들 들여 꽃을 피운다는 건 이 아이의 일일 텐데 그것을 가늠하는 건 다른 식물들과 조화를 고민하며 하엽을 자르고, 물 주기를 조절한답시고 관리자의 눈으로 살피던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1년은 열두 달인데 마지막 12월의 마무리만 기억하려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마지막 피워낸 꽃만 바라고 기대했던 게 아닐까. 끝없이 '무엇'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과 겹쳐지는 순간, 부끄러움이 까슬한 보풀처럼 일었다. 어떤 깨달음은 탄성보다 숨고 싶은 마음을 불러오는구나.


마흔다섯이 되도록, 늘 꽃 피우는 계절로 살고 싶어 했다니! 흙 속에서 자양분을 끌어당기고, 물줄기를 올리고 볕을 향해 잎을 넓게 드러내려는 애씀을 잊지 말라고 나를 깨우친다. 비교하며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보다, 자신 안에서 끌어올리라고 내게 말을 건다. 이 작고 엷은 꽃잎들이.

나는 무엇으로 나를 꾸며 뽐내고 싶은 걸까, 내 안의 씨앗을 발아시켜 열매를 맺고 싶은 걸까. 주저 없이 열매를 답하겠지. 그렇다면 너는 열매를 위한 길을 걷고 있는가! 스스로 묻고 돌아볼 시점인가 보다.



<전나무가 되고 싶은 사과나무> 그림책엔 빼곡한 전나무 숲이 등장한다. 크리스마스트리용 전나무를 키우는 이 숲에 한 소녀가 먹다 남은 사과를 버리고 간 후, 사과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이 사과나무의 고민이 이어진다. 어디를 둘러봐도 전나무인 이곳에선 누구든 유일의 특별함을 뽐낼 자신감을 세우기 힘들겠지. 사과나무 역시 늘 전나무가 되고 싶고, 자신도 전나무처럼 크리스마스 시즌에 훌훌 떠나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으로 힘들어하며 늘 그 자리에서 떠나는 전나무들을 지켜본다.


뚜벅뚜벅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없으니 늘 그곳에서 상상만 하며, 전나무처럼 화려한 변화와 이동을 갈망하던 사과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그림책의 엔딩은 너무나 열린 결말처럼 뚝 끊기는 느낌이 있지만, 어른의 시선으로는 홱 낚아챌만한 찰나가 있었다. 외로이 서 있는 저 사과나무를 휩쓸고 흔들던 바람 덕에 툭 떨어진 사과 한 알.

같은 열매지만 참나무가 기대하며 떨구는 도토리 한 알(<그 나무는 무엇을 보았을까?>-샘 어셔)과는 다른 의미의 무게로 바닥에 떨어진다. 사과나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 안의 에너지. 결국 사과나무가 그 에너지를 깨달았는지 뒷 이야기가 없고, 땅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이 다시 나무로 탄생할 수 있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내 눈에 보이는 '열매'는 분명히 있었다.


자신 안에서 찾아낸 힘으로 맺은 결실.

결국, 자기 발견이 답인 것일까 잠시 나를 들여다본다. 글을 쓰겠노라 말하고 오늘로 80일째 꾸준한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던 나 자신. 꾸준과 성실은 어쩌면 길고 긴 애정 혹은 열정을 유지했다는 것일 텐데, 어쩌면 이렇게도 혼자 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내 옆에서, 꺼져가는 불꽃을 끊임없이 불어 일으켜 세워주고 볕을 나눠주며 함께 걸어준 이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과나무에겐 없어 우연한 발견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내겐 내 안의 에너지가 충만함을, 기다릴 테니 그 에너지를 끌어내 보라는 응원으로 지켜봐 준 사람들이 있다.

전나무에 둘러싸여 시야가 막혔어도, 아마도 이 응원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을 것이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너를 꾸며 치장할 필요가 없다고, 그냥 너의 이야기를 쓰라고.


이 감사한 마음이 이어져, 어쩌면 제라늄에게 나 또한 응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다. 때가 되면 무거운 하엽을 잘라내 주어 고맙다고, 양지바른 쪽으로 나를 옮겨주어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내 응원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듯한 오늘.

그래, 꽃을 피울 엔딩보다 아직은 차곡차곡 꾸준함을 쌓으며 나를 발견할 때. 어디까지 줄기를 뻗어낼 수 있는지 어느 마디에서 나를 발견하게 될지, 올해는 '자기 발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울면 안 돼? 터트려 회복할 기회를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