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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 욱 Dec 19. 2022

보고서

10여년 전, 공무원을 시작하면서 크게 놀란 대목 중 하나는 보고서였다. 이전까지는 기사 형태의 글만 써왔던지라 개조식 보고서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가장 의아했던 건 폰트의 크기였다. 일반적으로 공무원 보고서의 본문 폰트는 한글 워드프로세서 기준으로 15포인트를 사용한다. 소제목은 16포인트, 문서 제목은 20포인트 정도를 쓴다. 


담아야 할 내용은 많은데 원페이퍼에 끝내려면 이 커다란 폰트가 야속할 때도 있었다. 애매하게 한 두줄 남겨놓고 뒷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 정도 되면 이걸 어떻게 더 짧게 써야 할 지 머리에서 쥐가 난다. 그럴 때마다 작은 폰트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본문 15포인트는 그야말로 국룰이라 손대면 큰 일 난다. 처음 모셨던 과장님은 출판 편집자 못지 않은 눈썰미로 0.5포인트 차이, 장평 5% 차이까지 잡아내는 분이었다. 


큰 글자로 문서를 작성하는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누군가 이렇게 설명해준다. "보고서는 읽는 사람을 위해서 작성하는 문서인데, 보통 이 보고서를 읽는 분들은 노안이 와서 잘 안보여. 그래서 큰 폰트를 쓰는거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 때 그 설명이 이제서야 조금씩 이해가 간다. 


요즘들어 부쩍 작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문을 읽을 때도 종이신문에서는 제목만 보고 읽고 싶은 기사는 별도로 인터넷에서 찾아 조금 큰 글자로 출력해서 읽는다. 좋은 칼럼을 발견해 읽고 싶은 욕구가 막 솟구치다가도 눈이 침침해서 안경을 위로 올리거나 독서용 안경으로 바꿔 쓰는 동안 흥분은 금방 식는다. 신문 읽어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지금 이 상황이 노화의 증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배가 나오는 것과 다르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큰 폰트의 보고서를 읽는 분들의 노고가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하여튼 오늘은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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