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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룻강아지 Aug 18. 2024

행복을 찾아서 1

혹시 나랑 닮은 사람 있을까봐

*삶이 극도로 허무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여태까지 내 생각과 남의 생각들을 관찰해보니,

바닷물에서 살아가는 물고기가, 바닷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한 개인의 생각은 능동적이지 않다. 그의 생각은 살고 있는 시대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여러 철학적 주장을 통과해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 뉴에이지에 서구철학이 종착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서 한국은 특수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한국 또한 사회가 돌아가는 걸 보면 서양철학의 진화적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 가치 같은 건 없으니 네가 되고 싶은 자신이 돼라'

- '인생은 번뿐이니 후회 없이 살아라'

- '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다' 라는 말을 반자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내면 안에는 신이 있다' - '내면을 충분히 들여다보면 신을 발견할 것이다' - '자아가 신이다' '네가 신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에는 참으로 동감하는 소리들이었다. 나는 이 시대의 물 안에 사는 물고기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저 가르침들에 따라서 '내가 되고 싶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경제적 자유를 쫓았으며,

'인생은 한 번 뿐이니 후회없이 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데 몰두했고,

'내면 안에는 신이 있으므로' 나의 신성의 힘, 자아의 창조의 힘을 찾아 인생을 바꾸기 위해 명상을 했다.



근데 나는 실패했다. 이 글은 저렇게 살면 행복하다는데 행복해지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저렇게 살아서 지금 행복하다면 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 뒤로가기 눌러도 된다.



만약 저렇게 살았는데 안 행복하다면, 한번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안 행복한건 정상이니까.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 20대라면, 정말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 주장 사이에서 빙빙 도는 데 7년을 버렸다.



위에서 얘기한 현대사회의 주장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반드시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허무주의란, 정말 딱 한마디로 정수만 남기면 '삶은 좆도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안 행복한 것이다.



현대사회의 주장 세 가지를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1. '내가 되고 싶은 나 자신이 되자'

2. '인생은 한 번 뿐이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후회없이 살자'

3. '내면 안에는 신이 있다'



1. '내가 되고 싶은 나 자신이 되자'

이 주장 아래 펼쳐지는 자아실현의 목표는 결국 유물론적이다. 현대사회는 물질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이라는 건 '모든 것은 물질적이다' 라는 주장이다.

극단적으로 쉽게 말해서 돈 많으면 장땡이다. 라는 게 유물론이다.



돈 많으면 장땡 맞잖아. 그게 뭐가 문젠데.

아 물론, 사는데 문제가 없다.

윤리적 가치가 어쩌구 그런건 인간의 참모습이 아니고 어쩌구 그런 소리 할 생각 없다.



유물론적 목표의 한계는 모든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종교심,

그 종교심에서 비롯되는 '허무' 의 감정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종교심을 갖고 있다는 건, 신을 배제하고 철학을 발전시켜온 서양철학 역사가 결국 신의 자리에 인도 종교를 갖다놓은 뉴에이지로 증명된다. 신을 안 배제한 쪽에 대해 종교심을 증명할 필요는 없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으며,

전 지구적으로 0.1%의 식사를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보고 들어 왔다.

식사로 따지자면 한국사회에 사는 연 2,3천 버는 사람도 전 지구적으로 봤을 때 매우 수준높은 식사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하던가?

유물론적 자아실현을 이뤄낸 사람들의 '심리적 종착지'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

'시발 성공은 했는데 뭐하러 살지'



2. '인생은 한 번 뿐이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후회없이 살자'

할 수 있는 모든 쾌락적 경험에 몰두하면, 도파민의 역치가 높아진다.

우리는 쾌락적인 경험을 할 때마다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오는데, 한 번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도파민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도파민이 예전만큼 나오기 위해서는, 더 쾌락적인, 더 자극적인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 끝이 어디인가? 마약이다.



최근 대학생들의 대형 동아리의 실체가 마약파티였다는 보도를 본 것 같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니 후회없이 산다' 라는 모토를 마음 속 깊이 지니고 있다면

마약 난교파티는 매우 합리적인 결론이다. 그만큼 짜릿한 경험이 어딨겠는가?



3. '내면 안에는 신이 있다'

라는 주장에 접근하려면, 일단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한다.

뉴에이지적 참나영성에 따르면, 마음은 뿌연 유리창, 혹은 오물이 떠다녀서 오염된 청정수 같다.

마음의 내면에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이나 카르마, 삼스카라 등이 떠다니므로, 그것들을 건져내고,

물에 락스를 풀듯 신성한 행위로 마음을 투명하게 만들면, 네 안의 오물에 잠겨있던 신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그 신성은 너의 초월자아인 신이고, 결국 네 초월자아는 너이므로 너는 신이며, 너는 창조의 권능을 회복할 것이라는 게 참나영성의 주장이다.



문제는, 실제로 명상을 해보면, 내가 마음을 비워서 깨끗하게 만들어도, 세상이 마음에다 더러운 걸 들이붓는다.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었는데, 회사 동료가 개 트롤링 짓을 해서 야근을 열시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집에 오는데 어깨빵을 당하고, 서로 흘겨보면서 집에 왔더니 부모가 싸우고 있다. 극단적인 예시라고? 이보다 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내가 비웠던 마음이 여전히 비워져있을 것 같은가?

수행자들이 세상을 등지고 산 같은 데 사는 이유가 뭘까? 그들은 세상에서 마음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마음은 능동적으로 더러움을 만들어낸다. 마음이 생각하는 건 오직 하나다. 경쟁에서 이기는 거. 생존. 마음은 자동적으로 생존을 추구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결코, 평생을 수행해도 마음을 온전히 비울 수 없다. 마음의 전체 비율 중에 '깨끗한 상태' 의 %가 올라갈 수 있을 뿐이지.



마음 한쪽에선 더러움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내고, 한쪽에서는 더러움을 비워내간다. 그 자리에 참나영성적 신성이라는 걸 조금 들이부어본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결코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 완전히 나를 비워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탈은 죽어야 가능하다. 죽었으니까 그 굴레를 벗어났다기도 뭐하군.



그리고 나를 완전히 비웠다면, 뭐하러 살아있어야 하겠는가?

해탈의 풍경을 일별해보면, 거기는 그냥 아무것도 없다.

재밌는건 참나영성 수행자 중 진정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도 몇 없다는 것이다.

참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내가 주체적으로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내면에 잠들어있다는 신성의 힘을 빌려서 삶을 개선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성으로 삶을 개선할 수 없다. 인간 안에는 신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졌다고 착각하는 신성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종교심일 뿐이며, 그건 종교심이지 신성이 아니다.

참나영성 수행자를 붙잡고 물어보라. 대체 '신성'이 무엇인가. 하고.

그들이 말하는 신성은 '초월적인 힘이 내 소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생존욕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 안에는 오직 생존본능밖에 없으며, 생존본능은 신성이 아니다.

생존본능이 아무리 빛의 수호가 어쩌고 하는 말로 자기 생얼에 화장을 해도 그건 신성이 아니다.

생존본능밖에 없는 신이 우주를 지배한다면 우린 에일리언의 숙주가 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게 자연선택이다. 그딴 걸 신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백 보 양보해서 내면의 힘을 빌려 삶을 개선했다고 하자.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유물론적 영성이었으므로,

이제 1번의 함정에 빠진다.



이래서 현대사회의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의 귀결은 반드시 허무주의다.

아.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실존주의 얘기하는 걸 까먹었다. 나한텐 그것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인간 실존은 본질에 앞서니까, 내가 내 삶의 가치를 주체적으로 정하면 된다고 그랬지.

결국 죽잖아. 죽으면 다 끝인데 내가 정한 가치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100년 전에 경성 구석 네번째 골목에 살았던 최씨아저씨의 막내딸

순희의 주관적 가치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 우주에 있는가?

내가 정한 가치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며, 그건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다.



주관적 가치의 유한함과 소용없음을 이성적으로 통찰하고도

눈감고 그 가치에 목숨바칠 수 있다면 솔직히 과거의 나라면 진짜 부러워했을 것이다.

난 안됐거든 그거.



또한 1,2차 세계대전 이후로 아무 의미도 없다고 결론난 철학사조를

가치있다고 믿을 순 없었다. 차라리 포스트모더니즘이 낫지.



위와 같은 사유로 나는 현대사회의 주장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신도 혹시 그런가?



나중에 보니 내가 했던 저 모든 짓거리를

예수의 사도인 바울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에베소서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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