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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Sep 08. 2019

울증의 병이 도질 때,
약을 먹듯이 글을 쓴다

나에겐 감정의 주기가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진 않지만 어느 순간 일관된 감정상태가 한동안 쭉 지속되는 상태.


에너지가 있는 주기에는 마음이 양지를 향한다. 에너지가 있어서 마음이 양지를 향하는지 마음이 양지를 향해서 에너지가 있는지 인과를 가리기 어렵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서로 연결되어 선순환된다. 이 시기에는 외부의 시선에 마음이 흔들리기보다는 시선에 걸리는 정보들이 입력된다. 거리나 주위의 변화가 빠르게 감지된다. 세상의 속도에 나도 덩달아 보폭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나의 부족함엔 대체로 관대한 편이다.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다. 건강이나 운동에 대한 계획이랄지, 뭔가를 배우기 위해 등록을 한다던지 하는 일은 주로 이 시기에 일어난다. 읽고 싶은 책에 대한 욕심도 많아져서 도서관에 가게 되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렇다고 많은 책들을 완독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책들을 산책하는 일이 즐겁다. 책을 대출하려다 대출한도 개수를 초과해 읽고 싶은 책의 우열을 가리기도 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일, 책을 읽다가 좋을 구절을 발견하는 일, 스피커볼륨을 높여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 작은 멋 부림, 딸과의 공원 산책 등 일상적인 작은 행동에도 나 스스로 소소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도 참 괜찮다'라는 자족도 한다. 옷차림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뭐 어떠리’ '인생 뭐 있어, 꼴리는 대로 살면 되지' 키 작은 감정들에 무심해진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좋겠지만 어느 순간 음지로 향하는 시기가 온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고 일상의 반복되는 일들이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처럼 피로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왜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먹어야 하는지 이 지긋지긋한 쳇바퀴를 누가 만든 건지 실존적인 고민이 무겁게 느껴진다. 때때로 일탈을 꿈꾸지만, 이렇다할 일탈의 경험도 없는 나를 자책한다. 나의 삶이란 것이 세상에 내던져진 돌멩이 같아서 쉽게 외로워지고 사람들의 위로의 말이나 칭찬도 가식처럼 느껴진다. 숨을 곳 없는 벌판에 혼자 남겨진 듯,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한 느낌이다. 뉴스를 보면 정치도 나라도 다 거지 같고 내 삶도 그렇다.

이 시기에는 비슷한 감정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 우울해서 소심해지고 소심함이 지겨워지고 지겨움이 술을 부르고 술은 슬픔이 된다. 그렇게 삶에 미안해지고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내 감정의 주기를 내 행동에서 쉽게 눈치채진 못하는 것 같다. 마음이 음지를 향해도 주어진 일은 해야하고 아이밥은 챙겨야하고 나의 자리는 지켜야 한다. 그게 나의 세계였다. 약간의 업, 다운 정도의 컨디션으로 짐작할 뿐 대체로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이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나의 페르소나다. 


나열하고 보니 조울증의 증상인 것 같다.


이런 감정의 주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다. 주로 그 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일과 관련된 프로젝트의 별다른 아이디어가 오랫동안 떠오르지 않거나, 내 작업이 반복적으로 느껴질 때,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을 느낄 때, 기대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었을 때, 뭔가 내 일상에 새로움을 찾을 수 없을 때 슬금슬금 울증이 고개를 든다. 생리일과 겹치면 100%다. 또 세월호 침몰 때와 조두순 사건(초등 3학년 여아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사건)처럼 사회적인 충격이 있었을 때는 오랫동안 나도 어쩌지 못하는 울증이 한동안 지속된다. 시대의 아픔은 개인의 아픔에 맞닿아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무래도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보니 그런 사회적인 사건에 더 진하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 같다. 

반대로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막 떠오를 때나 재밌는 일을 계획할 때, 일의 성과가 좋거나 피드백이 좋을 때는 마음이 다시 양지로 향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울증의 시기일 때 글쓰기의 욕구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조증의 시기엔 인풋의 욕구가 강하고 울증의 시기엔 아웃풋의 욕구가 강해진다. 무언가 마음속의 동요가 일어나고 어떻게든 외부로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타인을 붙잡고 나를 설득시키기보단 조용히 내 감정을 풀어내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에게 감정의 표현 수단이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배설하듯이 쓰고 나면 글 속에서 내 감정의 성분이 보인다. 내가 원하는 진짜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충족되지 못한 건지...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진짜 마음이 보인다. 싫었던 사람의 욕이라도 잔뜩 쏟아놓고 나면, 사실과 다르게 앞서가던 내 마음의 설레발도 보이고, 숨으려 했던 오리발도 보인다.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삶도 보이고 마음도 보이는 것 같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인정하려는 나도 보인다. 그리고 애쓰는 나도 보인다. 

그래. 괜찮아 뭐 어때... 그럴 수 있잖아...


그러다 보면 쩍쩍 갈라진 듯한 황량한 벌판 같이 느껴지던 마음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작은 풀들의 움직임처럼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게 된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마음의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품었던 욕구와 기대를 마주하는 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일이 못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걸...

어느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삶은 원래 그런 거라고... 

실체 없이 원망하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글쓰기는 백신이다. 

울증의 병이 도질 때, 약을 먹듯이 나는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내 감정을 더듬지 않으면 실체 없는 원망의 말들이 타인을 향하고 나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예고 없는 사고처럼, 혹은 항체가 생기지 않는 불치병이지만, 글쓰기는 매번 나를 다시 양지로 향하게 하는 백신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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