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의 오후 Jul 20. 2020

자식농사, 좋은 농부가 되는 법

이야기꽃 출판사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

주말 오전, 가끔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간다.

(지금은 코로나로 도서관이 대출업무위주로 하고 있어 한동안 가지 못했다.)

내가 빌린 도서의 반납과 대출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실컷 보기 위해서다. 내가 주로 머무는 어린이 열람실은 점심 무렵이 지나면 엄마손을 잡은 유아, 어린이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때문에 주로 오전 시간을 이용한다.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서면 우선 신간 코너부터 들러서 새로 들어온 그림책을 모으고 국내 그림책 코너에서 창작 그림책을 10~20권을 뽑아 자리에 앉는다.

그때부터 나의 조용한 그림책 여행이 시작된다.

새로운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빠져든다. 혼자 낄낄거리며 웃기도 하고, 혼자 눈물을 떨구기도 하고 주옥같은 문장과 그림에 감탄하며 그 세계를 누빈다. 이 시간 동안 난 고된 일주일을 보상받고 위로받고, 온전히 나의 감정과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인생 그림책을 만나면 일단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표지 사진을 찍어 두고, 그때의 첫 감동을 몇 자 적는다.

이야기꽃 출판사의 <수박이 먹고 싶으면>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읽고 나서 메모 대신 바로 필사를 했다. 두고두고 육아의 지침으로 삼으리라 생각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겨울이 말끔히 물러간 밭에

수박만 한 구덩이를 파고

삭은 퇴비와 참한 흙

켜켜이 채워 넣어야 한다.

거기 까만 수박씨 서너 개 고이 누이고

흙 이불 살살 덮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잘 자라라, 잘 자라라

조용조용 말해 주면 더욱더 좋다.

...

수박이 먹고 싶으면

옴질대는 싹눈이 마르지 않게

날마다 촉촉이 물 뿌려 주되,

수박 싹 제가 절로 난 줄 알도록

무심한 듯 모른 척해 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슬며시 둘러볼 적에

떡잎이 온 힘 다해 솟아나 있거든

대견해라 기특해라 활짝 웃으며

아이처럼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한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내가 필사까지 할 정도로 사랑하게 된 이유는

수박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지향했던 마음과 꼭 닮아서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오죽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라는 말이 있을까.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길을 잃을 때가 너무 많다. 불안한 마음에 내 선택이 아이의 길을 막는 것은 아닐지, 아이의 욕구는 무시한 채 내 욕망을 앞세우는 건 아닐지 헷갈린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당연한 순리를 생각하게 한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오랜 농부들의 가르침에 자식농사도 이와 다르지 않겠구나 생각하게 한다.


날마다 사랑을 주되 넘치지 않게 잘 자라라 잘 자라라 격려해주라고

아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무심한 듯 모른 척해주라고

그러다가 대견해라, 기특해라 아이만큼 기뻐해 주라고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라니며 멧돼지며

고라니 같고 멧돼지 같은 꼬맹이들이

설익은 몇 덩이 축내더라도

서운해 하거나 골내지 아니하면서


줄무늬 또렷해질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고

덩굴손 마를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고

꽃자리 우묵해질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고

중지 마디로 통통 두드려

맑은 소리 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내 아이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가 사는 세상과 환경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라고

조금 더디더라도 혹은 실패하더라도 내면의 힘으로 스스로 깨우치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고 이야기한다.


뽑아내고 돌아보면 또 돋는 잡풀

흟어내고 돌아보면 또 생겨난 진딧물

일일이 손으로 뽑고 훑으며

짠 땀이 뚝뚝 떨어지는

고단한 노동을 마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너무 지치거나 더위를 먹지는 않게,


가끔 원두막 그늘에 올라

시원한 미숫가루 한 사발 들이마시고

낮잠 한 숨 잘 줄도 알아야 한다.


자녀를 키우는 일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고된 노동이며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러니 아이만을 위한 삶에 올인하지 말라고

조급해하지 말고 나를 돌보며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어이! 이리들 오소!"


수박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커다란 손짓으로 불러야 한다.

엊그제 다툰 사이도, 지나가는 길손도

이리 와요! 반가이 불러

정답게, 정답게 둘러앉아야 한다.

그래야 수박은, 잘 익은 수박은


칼도 닿기 전에 쩍! 제 몸을 열어

단물이 뚝뚝 듣는 붉은 속살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느새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는 열매로 자라서

무엇이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그 어떤 육아서보다도 나를 벅차게 해주는 글들이었다.

이렇게 키울 수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만 자라준다면...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조금씩 노력하면

내 아이도 조금은 닮아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해 준다.

그리고 하나둘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조금은 살만해지지 않을까...


꾹꾹 눌러쓴 글씨를 오늘도 따라 읽으며

다짐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차라리 죽어버릴까? 그러면 다들 후회하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