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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Oct 29. 2020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1학기 반장선거에서 반장에 당선되었다.

반장선거가 있기 며칠 전 선생님은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몇 명을 반장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면 후보가 된 아이들은 선거 당일날까지 출마의 변을 준비해서 선거를 치렀다. 반장이 되는 것을 그렇게 원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투표로 반장이 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나의 부모님은 반장이 되는걸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3학년 2학기 때 처음 반장이 되었을 때, 엄마는 '뭘 그런 걸 하려고 하니, 힘들게. 그냥 평범하게 다니면 좋겠구먼'이라고 말했고 이후 학교에 가야 하는 일을 반겨하지 않았다.


학교는 학년 초가 되면 환경미화로 몸살을 앓는다.

교실 앞쪽 벽면에는 새로운 시간표와 지켜야 할 것들이 담임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알록달록 꾸며지고 뒤쪽 벽면은 아이들의 새로운 작품으로 채워진다. 반 커튼과 교탁보가 새 것으로 교체되고 화분들이 들어온다. 학교에서는 그 시기에 학부모를 초청해 잘 키운 국화를 판매하고 학부모는 국화들을 교실 안에 전리품처럼 진열한다. 그리고 누구의 부모가 기증했다는 서명도 잘 보이도록 달아놓는다. 교실 안에 국화가 많은 반의 담임은 동료 선생님들의 부러움을 샀다.

임원이 된 아이의 엄마는 담임과 학급에 필요한 부분을 전달받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부담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교실은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환경미화는 언제나 반장이 선출된 후에 이루어졌다.


4학년 때 담임은 4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3학년 반장일 때는 2학기이기도 했고 남자 담임선생님이어서 그랬는지 환경미화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교실에 큰 휴지통이 필요하니 엄마께 말씀드리라는 담임의 부탁에 휴지통을 들여놓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4학년 담임은 반장 선출 후 곧 반장 엄마가 학급을 위해서 어떤 액션을 하리라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내 밑으로 3살, 5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던 엄마는 내가 반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을 두지도, 둘만한 여력도 없었다.

담임과 엄마가 따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난 알 수 없었으나 얼마 후 교실에는 부반장 엄마가 자주 들락거렸다. 부반장이었던 남자애는 외동이었고, 우리 집에는 없었던 전화가 있었다.(가정환경조사를 한 이후 담임은 반장인 우리 집에 전화가 없어 많이 불편하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 소외되어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지만 난 어른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환경미화 심사가 있기 이틀 전 담임은 나를 불러 백합꽃을 사 오라고 주문을 했다. 교실에 남는 수반이 있으니 거기에 꽂을 백합꽃을 사 오라고... 정확하게 꽃 이름까지 주문을 했던 것을 보면 환경미화에 예민하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고 그날 오후 엄마는 꽃집에 가서 백합꽃을 사 왔다. 풍성한 안개꽃에 둘러싸인 백합꽃 한 송이. 백합꽃은 달랑 한 송이였다. 꽃을 보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담임이 주문한 게 이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어쩌지 못하고 다음날 조심조심 꽃을 들고 학교에 갔다.

그걸 받은 담임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교실 휴지통에 통째로 버려진 안개꽃 무더기를 보았을 때 예상대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다음날 교실 수반에는 풍성한 백합꽃 한 무더기가 예쁘게 꽂아져 있었다.


그 후로 담임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급의 많은 부분을 반장인 나의 책임으로 돌렸다. 반장이 제 역할을 못해서 많은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라고 했다. 수업시간엔 노골적으로 나를 면박 주는 일이 많았다. 나는 예고 없이 혼나야 했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크게 혼이 났다.

이후에도 공개수업용 그림판을 작가한테 그려오라는 등 몇 번의 요구가 더 있었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 집은 그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다. 학기말 내가 받아야 할 우등상장은 부반장에게로 돌아갔고 나의 단짝 친구는 나보다 더 부르르 떨었다. 야만이 야만인줄 모르고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담임이 나를 미워한 만큼 나도 담임을 싫어했다.

매일 담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나는 엄마에게 전학을 시켜달라고 졸랐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매일 울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쓴 소주로 당신들의 괴로움을 달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당시 나의 어른들은 그랬다.


어른이 된 지금, 그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다.

어려운 형편 식구 많은 집의 어쩔 수 없는 이유는 수천수만 가지가 있었겠지만,

백합꽃 한 송이로밖에 마음을 낼 수 없었을까 생각이 들 땐

아이의 입장을 살피지 못했던 엄마에게 큰 서운함이 올라온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천박했던 담임은 내 인생 최악의 어른으로 남아있다.

다행인 건 5학년 때 정말 따뜻한 담임선생님을 만나 그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내 아이의 뒷모습을 볼 때

지금의 내가 엄마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가끔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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