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빌런이 된 예비 시댁식구 이야기-1
여기 배려라면 대한민국 1등인 여자, 하나 있다.
세상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와 직접 보면 더 놀랄 외모까지 갖춘 내 여동생 말이다(누가 봐도 예쁘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동생은 48년 살면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경우 없이” 굴어본 적이 없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경우 없이”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나처럼 정신줄을 놓지도 않을 뿐더러 태생부터 우린 다르다 그녀는 긴 호흡을 하고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지은 후 감정이라곤 소멸된 입으로 누구도 반박 못할 진실 만을 얘기하며 뼈 때리기를 시전 한다 그 이후는 상상하지 말자, 우린 그녀 앞에서 2억 7천만 년 전 삼엽충이나 고사리 화석처럼 굳어버려 영영 묻혀버릴지 모른다.
여기 배려라면 대한민국 2등인 여자, 하나 또 있다.
세상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와 직접 보면 더 놀랠 외모까지 갖춘 나... 말이다(목소리와 달리 너무 평범하게 생겨 놀랄까 하는 말이다 여동생과 내가 자매라고 밝히면 유감스럽게도 다들 믿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십 평생 살면서 배려를 안 하고 살아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물론 그 배려는 여동생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마흔 살이 되어 철들기 전까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친해본 적이 별로 없다.
여동생의 배려를 단어로 얘기하자면 대략,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 봄 <예의 바름 <천절함 <이타적 탐색 <이해함 <다정함 <섬세함 <치밀함 <완벽함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나의 배려를 단어로 나열해 보자.
{처음 봄 <불편함 <이타적 탐색 <적당히 <모른 척 <적당히 <무심함 <배타적 경계 <편안함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합니다}
환절기가 오기도 전에 “환절기가 코앞이야! 감기조심해~” 와 환절기가 지나갈 때쯤 “감기 걸렸어~ 야ㅡ너도?”의 차이라고 하면 퍼뜩 와닿으려나....
그런 우리 둘에겐 남동생이, 있다.
{적당한 직장에 적당히 예의 바르고 적당히 친절하며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이타적이지만 짠돌이 기질로 누나들에게 맨날 지청구를 듣는}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건 친정엄마의 심정일 거고, 우린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일하는 엄마 덕분에 똥 기저귀 갈아주고 놀러 나갈 시간에 (울상으로) 분유 타서 먹여가며 그놈을 키웠다.
그런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 결혼이란 걸 한다고 “여자”를 데려왔다 “무려 예쁜 여자”
그 후 고요한 듯 보였지만 배려심 넘치는 누나 둘에, 통 관심 둘 데 없어 심심하던 매형들까지 고요 속에 외침이라고 해야 하나... 혼신을 다해 궁금함을 참고 있었다. 되려, "00야, 우리집에 와 준다니 정말 고맙다"라는 한마디로 예비 며느리 기세우기에 성공하신 일흔이 넘어 친구들과의 여행에 늦바람 난 친정엄마는 그 귀한 아들이 결혼을 언제 하든, 상견례를 어디서 하든 "아이돈케어~"를 외치며 관심밖에 행보를 보여서 딸들과 사위들을 내심 놀라게 만드셨다.
남동생에 관련된 카더라~의 두어 가지 소문이 꼴랑 6명 가족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할 무렵,
“아이돈케어~“인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소문이 궁금하던 차였지만 묻기도 전에 딱 세 마디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첫 번째, 혼수와 예물 따윈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당사자 두 사람이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다.
두 번째, 시누이 된다고 예물 같은 거 받을 생각 하지 마라, 나부터 안 받을 테니! (친정엄마는 딸내미 둘 시집보낼 때도 안 받으셨다)
세 번째, 상견례도 예비사돈댁이 편한 장소로, 결혼식도 예비사돈댁이 원하는 지역에서!
(오해는 말아달라. 남동생이 딱히 어디 흠있는 놈은 아니다)
당연했다 우리 식구 중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예상외로 기특하게 나와주시는 친정엄마도 고마웠고, 고맙기로 말하면 입 아픈 두 사람에게 이 정도의 배려 따위야! 안 그래도 신혼집 마련 걱정에 고민이 많을 남동생에게 예물이나 혼수를 바라다니, 안될 말이다 게다가 마흔 살 넘어가는 동생을 구제해 주겠다는데 상견례 장소가 우주 한복판이면 어떻고 경사 중에 경사일 결혼식이 남해의 어느 외딴섬이면 어떠랴....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저 둘이서 결혼준비 잘해주길, 무사히 결혼 후 잘 살아주길, 진심으로 그것만 바랐다 뭐, 한 가지 정도 더 바란게 있다면... '올겨울은 욕심인 거 같고 내년 봄은 어떻겠니....?' 라며 조심스레 결혼을 재촉해 볼까 상의한 정도....? 그것마저도 둘이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우린 조용히 입 다물기로 했다.
엄마의 하명에 누나 둘은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주말에 남동생을 불러 우리 가족의 의중을 얘기한 것이다 다정도 병인 여동생은 식사와 와인, 디저트까지 준비하며 동생 앞날에 펼쳐질 결혼절차에 고된 행보를 응원했고 고맙게도 매제 또한 신혼집을 어느 곳에 매매, 혹은 전세로 시작할지 고민하는 남동생 옆에서 진지한 상담을 해주며 격려했다 도움 따위 될 리 없는 큰누나지만 나도 계속 편하게, 편하게,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 둘만 좋음 우린 다 좋다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다
다행히, 남동생의 생각은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배려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배려해야지, 당연한 거잖아 우린 흡족해했다
”어서 가라, 가서 예비신부가 될 그녀에게 우리의 맘을 잘 전달해 달라"로 그 자리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사달은 그 죽일 놈의 당연한 ”배려“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