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의 글씨는 크고 우렁차다. 글씨 하나로 공책을 다 잡아먹고도 남을 정도. 바른 글씨로 공책을 잡아먹었다면 좋았을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삐뚤빼뚤하다. 아이들은 원래 삐뚤빼뚤하게 쓰지 않는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자신의 글씨를 가끔 읽지 못하는 아이의 선한 얼굴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다. 알림장에 쓴 글씨를 선생님이 검사하고, 내가 한 번 더 본다. 선생님은 “방학 동안 글씨가 더 커졌네” 하셨단다. 아이는 해맑게 내게 그 말을 전한다. 아이가 신발을 거꾸로 신었던 때가 있었다. 왼쪽 신발을 오른쪽에, 오른쪽 신발을 왼쪽에 신고 불편한지도 모르고 외출을 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에겐 신발의 규칙보다 세상에 맞서야 할 아이만의 규칙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아이가 빨대 컵에 담긴 물을 흠뻑 빨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고, 종이를 쥐고 있는 왼손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가위질 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문드문 읽던 한글을 읽게 되기까지 나는 기다려왔다. 아이의 손에 빨대 컵을 쥐여주고, 가위질할 때 손을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고, 같이 책을 읽으며 한글에 익숙해지도록 해주었다. 왼쪽 신발처럼 생긴 것은 왼쪽으로 가야 하고, 오른쪽 신발처럼 생긴 것은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해주었을 뿐이다. 어느새 냉장고 문을 열어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가위질을 능숙하게 하는 만들기 여왕이 되었으며, 혼자 책을 읽을 수 있는 어린이가 되었다. 뒤돌아보니 하루아침에 된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아놓고 보니 한 폴더에 모이게 되었지만, 각각의 일상이 아주 익숙한 일이 되기까지 아이는 수백 번 반복했다. 이제 신발의 좌우를 살피지 않아도 알아서 발은 각자의 위치로 쑥 들어가고, 가위는 더 이상 위험한 물건이 되지 못했다. 이왕이면 바르게 글씨를 썼으면 좋겠는데, 둘째의 글씨는 언제쯤 세상이 원하는 적당한 모양을 갖춰갈까? 이것도 내가 모아놓은 아이들의 수만 가지의 흐름 폴더에 아무렇지도 않게 안착하게 될까? 오늘도 물음 하나를 놓지 못하고 손에 가만히 쥐어본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은 부모의 물음에 응답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다 해결하는 어른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사랑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