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처음으로 생각했던 일은 저를 소개하는 작가명과 인사말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안부라는 이름처럼 편안한 느낌으로 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이 한 줄을 적고 소개하는 일이 어색해서 뼛속부터 간지러운 기분이었어요. '나는 지금 작가도 아닌데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내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이름을 쓸 수나 있겠어?' 마치 신입 사원이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바로 사장님이나 팀장님의 직함을 다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무거운 단어였죠.
2년 하고도 절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두껍지 않은 흰 밀가루 반죽을 얼굴에 붙이고서 전보다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 이런 처음이 없었다면 여전히 집, 회사, 집, 회사를 반복하며 창작을 생각하지도 못하는 생활로 고통받았을 거예요. 작가 일을 하며 회사도 열심히 다닌 덕분에 진급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설레는 단어지만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시작하고는 금세 원래 습관으로 돌아가거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쉽게 다짐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내가 해서 뭘 하겠어.”, “시작했다가 금방 포기할 건데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아.”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 같은 사람은 노력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난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는 재능도 없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술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어.’,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 빨리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작가를 하고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께 자주 그런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하는 사람은 밥 먹기 힘들고 고생만 하다 실패한다. 그거 해서 뭐 할래? 우리 집은 그런 거 지원해줄 여력이 없다... 그 말들은 커서도 제게 큰 족쇄가 되었고 ‘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거야! 그림 그리면서 살 거야!’라는 꿈도 갖지 않았어요. 그림과 애니메이션 작품을 좋아했기에 어렵게 대학에 입학해 관련 학과를 졸업했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나의 능력으로 막연하게 취직해서 돈 버는 일이 꿈이라면 꿈이었어요.
그런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작가가 되어 그림 연재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울증’의 도움이 컸습니다. 20대 초반에 찾아온 우울증의 도움이 컸다니 무슨 말이냐 싶으시겠지만,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시간이 없었다면 제가 회사에 다니면서 작가를 해보자고 다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차피 죽는 인생이라면 하면 안 되는 그림을 그리다가 죽는 인생도 괜찮지 않나? 당장 내일 내가 죽는다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뭐지?’라는 생각을 했고 저는 좋아했던 창작을 하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기력증과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느낌(나중에 알고 보니 그 느낌을 이인증이라고 하더군요.)을 바꿔야만 했어요. 그림을 그리고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의미는 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저를 바꾸고 우울증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어려운 삶을 이겨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책에서 찾았습니다.
저보다 더 큰 어려움 속에서 자기 뜻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쓰러진 저에게 터널 출구와 같은 작은 빛이 됐어요. 지금은 우울증 약을 먹지 않고도 우울이란 감정과 친구처럼 생활하며 작품을 연재하고 회사도 다니고 있습니다.
책 [마인드셋]을 읽고 그린 일러스트, 우울한 감정도 나 자신이란 것을 알고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으려면 책을 출판하거나 수익이 발생해야 하는데요. 혼자 스스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부르며 그림을 연재하는 일은 온전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고 처음부터 꿈을 위해 달려온 분들과 비교하면 제 계기는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뒤늦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나대는 건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연재를 시작하고 지금껏 부딪히며 살아온 덕분에 ‘아, 지금이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며 연재하는 순간만큼은 저는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있으니까요.
작가를 시작하고 싶으신 분들은 두렵고 부정적인 자신의 마음에 한 번 인사를 건네보면 좋겠어요. 어쩌면 어설프게 시작할 수 있는 자신의 의미를 만들지 않을까요? 인사도 먼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면 처음엔 어색해도 익숙해질 때쯤 작가가 되기 위해 좀 더 성장한 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꽃이기 이전에 내가 먼저 나에게 그 이름을 불러보세요. 불린 이름은 분명 작지만 예쁜 꽃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