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과 유산에 대처하는 심리가이드> 에이미 웬젤 저
-임신성 외상을 겪은 이들을 위한 회복안내서
내게 필요한 책을 우연히 만날 때가 있다. 알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책이 나타난다. 그렇게 다가온 책을 읽다가 고민의 실마리가 풀릴 때가 있다. SNS에서 <난임과 유산에 대처하는 심리 가이드>라는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없는제목이었기에, 책을 주문했다. 책은 꽤 두툼했지만, 술술 읽혔다.
저자는 미국에서도 몇 안 되는 주산기(일반적으로 출산 전후를 일컫지만, 저자는 임신과 관련된 포괄적인 기간을 지칭) 여성 심리를 전문으로 하는 임상심리학자다. 저자는 임신을 준비하는 여성이 경험하는 최악의 상황인 유산과 난임 시술 실패를 ‘임신 관련 상실’, ‘임신 관련 외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인지행동치료(인간에 대한 기본 관점과 심리적 문제의 발생 및 치유 과정에 대한 주요 원리를 인지-정서적 과정의 의미로 파악하는 여러 개별적 이론의 집합체. 네이버 지식백과)를 통해 돕고 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이 책의 내용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유산 경험 덕분에 책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저자는 심리적으로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여성인, 유산과 난임을 겪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적당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이) 대부분은 도움을 받으려 읽은 책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만났다고 한다. 도움을 받으려고 읽은 책에 현실적인 대안 없이 감상적인 위로만 있거나, 저자의 자녀, 출산, 나이 같은 상황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비슷한 경험들이 많았다.
누군가 위로의 제스처를 취할 때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상황이나, 그 사람의 아이들을 보면서 더 큰 상실감과 열등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말이나 조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는 독자들이 겪을 이런 고충을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독자들을 위한 저자의 세심한 배려였다. 덕분에 이 책에 대한 몰입도는 한층 높아졌고, 저자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도 커졌다.
저자는 주로 유산을 겪은 여성들을 예로 들고 있다. 유산을 겪은 여성들의 상실감을 감히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다만, 유산을 겪은 여성들의 심리적 상태나 삶에서 겪는 갈등 모두가 난임을 겪은 나와 너무나 흡사해서 내게 적용해도 무리가 없었다.
저자는 부모나 가족을 잃은 이들이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과 달리 임신 관련 상실을 경험한 이들을 위한 애도 과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임신성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고,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돌보는 방법들을 안내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10단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먼저 유산을 경험한 이들이 애도하는 과정과 유산 후 몇 주를 버텨내는데 필요한 현실적인 조언, 상실을 경험한 이후에라도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들, 난임 시술의 실패 이후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 임신과 출산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유지하는 태도, 유산 후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법, 임신한 여성이나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을 마주하는 방법, 유산과 난임을 겪은 후 앞으로 방향을 결정할 때 도움을 줄 방법들, 자신을 돌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임신성 상실에서 의미를 찾아 더 나은 삶을 바라보도록 하기 등이다.
저자는 위와 같은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여성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품위 있고 위엄 있게 성장하면서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요?”
이 질문 덕에 저자를 찾아온 내담자들(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온 이)은 상실감이 찾아온 순간 ‘품위와 위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고 한다. 저자 스스로도 유산의 아픔을 극복하며 힘든 순간을 통과하는 중에 ‘품위와 위엄’이 부족했음을 고백했다. 저자는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임신성 외상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성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과연 고통스러운 감정이 몰려드는 순간에 품위와 위엄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감정을 다루는 법도 모르는데, 성장을 이야기할 정도로 단단해질 수 있을까?
‘품위와 위엄’ 어려운 말이다. 저자는 어떻게 해서든 힘든 순간을 지나가는 법을 터득하고, 자신을 돌보며 통과해 보라고 격려의 말을 건넨다.
책을 마치며, 저자는 자신에게 자녀가 있는지 여부를 알릴지 결정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이가 있든 없든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 살아가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만나온 내담자들이 자신과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주저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아는 사려 깊고 신중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의 이야기를 이해해 주고 수용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진심으로 고마웠다. 자신의 이야기가 혹 독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배려하는 저자의 진실한 마음은 나를 가장 크게 위로했다.
난임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던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그 감정의 힘이 빠지기를, 내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지한 내게 길잡이가 돼 줄 책을 만난 것 같아 기쁘다. 저자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언들, 왜곡된 사고를 수정하는 방법들, 수면 위생과 긴장을 이완하는 방법, 단절된 관계를 이어가는 연습들 여러 가지가 일상생활에 도움을 줄 것 같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책을 마무리했다.
“궁극적으로 자녀가 있든 없든 나는 당신이 감정적 동요를 받아들이고, 관점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가치에 따라 진중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회복과 행복으로 가는 길은 많다. 당신이 우아하고 품위 있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길 응원한다.”
저자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