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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Dec 24. 2024

엄마와 아들 그리고 눈물

친구 딸 결혼식에 갔었다. 이번 달 들어 결혼식이 줄을 잇고 있다. 마치 연말은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처럼, 주말마다 빼곡하다. 항상 그랬듯 부러운 맘 반, 답답한 맘 반의 상태였다. 결혼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된 것이 부러웠고, 아직 기미가 묘연한 우리 집 사정을 돌아보면 답답했다. 하여튼 젊은이들이 서로의 의지를 합해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대견스러운 일이다. 결혼식장은 하객들이 너무 많아 혼잡했다. 내심 결혼식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식사를 하러 가자는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식사 장소도 혼잡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겨우 친구들과 같이 앉을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여러 대화 중에 '눈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한 친구가 요즘 TV를 보다가 조금이라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 더 심했던 사례를 말하기 바쁘다. 그중에 공감대가 일치되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주제이면 눈물이 전혀 통제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이 육십이 훨씬 넘은 사람들이 어머니 이야기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감정이라니. 사실 나만 그런가 하는 의구심으로 남에게 말하기를 쭈뼜거렸었는데, 동병상련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 집안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있었다. 엄마는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가기 급급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내가 커 갈수록 교육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요구에 대응하기도 버거웠던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와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희박해져 갔다. 이런 분위기는 내가 군 장교생활, 결혼이 이어지면서 더 악화되어만 갔다. 그러다 덜컥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려졌다. 후유증으로 신체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엄마의 자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의해서 집안의 모든 일이 움직여져 왔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허상이었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엄마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 이후,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엄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큰소리치고 닦달만 할 줄 알았지, 실제로 움직여서 해결하던 사람은 엄마였었다. 그러다 엄마의 병환이 위중해지고 대화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집안의 모든 상황들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엄마가 영면하기 한 달 전부터, 직접 간병을 했었다. 아무 말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엄마 곁으로 왔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엄마에게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발부터 싸늘해지는 체온을 느끼면서 엄마와 이승에서 작별을 했다. 엄마의 차가워진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며 몸부림쳐봤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죄책감이었다. 나의 경우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주제만 나오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갱년기 때문이라고 둘러대긴 하지만, 아마 친구들도 유사한 감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내가 오랜만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아들들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었다. 아들 둘은 모두 독립해서 각자 다른 곳에서 기거하고 있다. 비록 몸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아내의 마음 속에는 아들들이 항상 곁에 있다. 밥은 잘 먹는지, 추운데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하는 일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하지는 않은지.....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차라리 같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넋두리도 많이 들었다. 가끔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불쑥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고 담에 가보면 반찬이 그대로 있다고 한숨을 내뱉곤 한다. 


좀처럼 아들들에게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내가, 그날은 유달랐다. 아들들이 전화도 받지 않고, 전화도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전화했을 때 바쁘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를 하는데, 한참 지난 후에도 전화가 없었단다. 분명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으니, 나중에 전화가 오겠지 하고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안다. 아들들의 심리 말이다. 엄마는 항상 자신들 주위에 있는 산소 같은 존재로 여긴다. 어떤 행동을 하던 엄마는 늘 자기편이고 이해해 줄 것임을 기대한다.


오랜만에 가족들 모두 집에서 식사하게 된 날, 묵직하게 한마디 해줬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더 잘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까지나 옆에 있지 않다."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 눈치다. SNS 감성시인 하상욱의 "엄마는 아직도 내가 어린 줄 알고 나는 아직도 엄마가 젊은 줄 안다."가 생각난다. 엄마와 아들의 인식 차이를 이처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엄마가 늘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는 줄 알다가, 어느 순간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허망해 한다. 결국 훗날 나처럼 죄책감에 자주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엄마와 딸, 언제나 살갑고 친구같은 사이다. 때론 최악의 적이 되기도 하지만, 엄마는 늙어 갈수록 딸을 친구 처럼 여긴다. 이에 반해 엄마와 아들 사이는 사무적이고 건조하다. 특히 나와 엄마의 관계는 그랬었다. 이제와서 툭하면 회한의 눈물을 흘려 보지만, 죄책감으로 남은 응어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라는 유대인 격언이 있다. 내가 커나온 매 순간에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마치 신과 같이 항상 나를 지켜주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언제까지나 곁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 지금 살갑게 엄마에게 다가가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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