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속의 '혐'의 감정 허용
현실이 좋아졌다. 현실에서 즐길거리가 눈에 잘 들어온다.
싫은 것과 즐길 수 있는 것. 둘 중 하나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면, 좋은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싫은 것은 그저 나에게 붙지 않게끔 흘려보내면 되는 것.
혐의 마음을 크게 가질수록 그것에 집중하여 더 크게 느끼게 된다.
혐의 감정을 풀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들어 있던 혐의 감정을 허용해야 한다. 무엇을 그렇게 혐오하는가? 사실 그 이유는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서 찾을 수 없다. 현실의 현상 때문에 혐이라는 감정이 느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분화되면서 느꼈던 초기에 불쾌한 감정 기억이 혐의 감정으로 압축되어 무의식 안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그 혐의 감정을 씌울만한 상황이 나타난 것이고, 개체는 본인 무의식에 들어 있던 혐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우선, 본인이 '혐'의 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경험했을 때 본인이 ‘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우선이다.
'혐'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살면서 분별을 지니게 된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 적인 것으로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데, 사실 그것은 본인 입장에서 내리는 판단이다. 영성에서는 정상/비정상이라는 것이 없고, 모든 분별을 없애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악’이라고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함 불리함을 따져서 불리함 쪽에 가까울 때 ‘악’이라고 느낀다. 태초의 분별(이분법은) 태어났을 당시 생존에 유리함 불리함을 따지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 그 상황이 나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악’으로 규정한다는 이야기이고, 생명을 가진 이상 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이분법적으로 상황을 분별하게 된다. 본인이 확고하게 옳은 가치라고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 입장에서의 생각인 것이다. 영성적 입장에서는 옳은 가치 그른 가치라는 것이 없다. 세상은 이원론의 세상이어서 하나의 가치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 반대의 가치 또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부정적인 가치는 그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분화된 것이다. 일원의 세계에서는 가치의 분화가 없기에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무일뿐이고(무극 상태), 하나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의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항상 쌍으로 긍정 가치/부정적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적 가치는 긍정적 가치를 잉태하는 역할을 한다. 부정적 가치 또한 세상에서 부정성 드러냄으로써 상대편의 긍정적 가치를 빛나게 해주는 제 역할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부정적 감정, 관념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무의식 속 관념 허용의 첫걸음이고,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들이 가지는 고정관념 등을 풀어내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본인의 내면에 해당 부정적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대의 가치를 경험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네빌 고다드의 저서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신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표현한다. [개체 의식 -> 잠재의식(집단의식) -> 무의식(=근원)]으로 의식의 깊은 상태로 들어가면 가치가 상대성으로 분화하기 전 상태이기 때문에, 희미하게 ‘나’는 있다고 느끼지만 그 내가 ‘어떤 나’인지 알 수 없다.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하여 나라는 느낌을 느끼게 끔 창조된 것이 이원화된 세상(현실)이다.
무의식 -> 집단의식을 거쳐 개체 의식으로 올라온 육화 된 한 사람은 하나의 관찰 렌즈로서 역할한다. 수많은 렌즈들은 모두 신의 현현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무의식 속의 부정적 관념들을 허용하여 진짜 나의 표현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완성된 신의 표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