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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v Nov 03. 2023

재료가 될 것들

그림책 읽어주는 아빠 그림책 [프레드릭]

나는 '기록'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록하는 행위'가 참 좋다. 기록은 지나갈뻔한 일상의 순간들을 노트라는 나만의 공간에 차곡차곡 붙잡아두게 한다. 노트를 집어 들고 써놓았던 것들을 한 장씩 들춰보면, 그때의 감정, 느낌, 생각 그리고 그 순간의 이미지들이 같이 떠올라, 아주 잠깐의 시간여행을 할 수가 있다. 


레오 니오니 작가 그 그리고 쓴 [프레드릭]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그림책에는 귀여운 생쥐 프레드릭과 친구들이 등장한다. 친구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저마다 분주히 일을 한다. 자기가 먹을 양식들을 열심히 모으는 동안 프레드릭은 친구들과는 좀 다른, 혼자만의 것들을 해나간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나도 일을 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프레드릭, 지금은 뭐 해?"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추운 겨울이 되자, 생쥐들은 모아두었던 식량들로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느새 식량은 바닥나고, 그들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와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때, 프레드릭은 모아둔 햇살 이야기를 해준다. 생쥐들은 프레드릭이 들려주는 이야기 덕분에 몸이 점점 따뜻해져 가는 걸 느낀다. 또, 프레드릭은 쌓아두었던 파란 덩굴꽃과 붉은 양귀비꽃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생쥐들 마음속에는 저마다 그림이 하나둘 그려지게 되고, 그 그림들은 추운 겨울날을 따스히 보내도록 도와줄 재료가 된다. 


나는 연년생 남매 아이들이 하는 말, 그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아이들이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들을 할 때면 신이 나서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가 노트에 적고, 그 말을 했던 상황을 덧붙여둔다. 기록해 둔 아이들의 말과 일상을 가끔씩 꺼내보면 아빠로서 놓쳐서는 안 될 일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나는 첫째 하이미가 손을 너무 자주 씻어서 건조한 계절에는 손이 부르트게 된다는 걸 기록해 두었다. 기록해 둔 걸 다시 보며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손을 자주 씻게 되는지 고민했고, 그 순간 손을 자주 씻어야 편안한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아이의 마음을 읽게 되니까, '하미야, 손을 그렇게 자주 씻지 않아도 돼.'라는 내 반응이 '손을 자주 씻는 건 네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야.'라며 좀 더 공감된 반응을 해줄 수가 있었다. 또 한 번은, 하성이와 분리수거했던 날을 기록해 두었다. 아빠를 따라나선 하성이가 자기도 힘을 내 분리수거 물건을 들고 갔고, 스스로 정해진 자리에 쓰레기를 분류했다. "아이고! 잘하네 아주!" 경비아저씨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격려 한마디를 건넸다. 그 격려는 아빠의 도움 없이 자기 몫의 분리수거를 끝낸 아들에게 성취감을 더해주었다. 집으로 가는 아이의 표정이 밝았다. 수첩에 적어둔 '분리수거했던 날의 일'을 다시 보며, 아이가 성취감을 누릴 활동으로 '분리수거'를 한번 더 기억했고, 느리고 서툴더라도 스스로 해내도록 기다려줘야겠다는 생각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의 일상은 언뜻 보면 매일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곱을 떼고, 옷을 갈아입고, 유치원에 가며, 때가 되면 하원을 하고, 저녁밥을 먹고 잠자는 매일의 나날들이다. 그런데 기록을 하고 들여다보니, 그 일상을 사는 아이들의 기분이 매 순간마다 다르고, 그날의 생각이나 컨디션이 전혀 똑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아이들의 기록은 아이를 향한 나의 마음을 가다듬도록 돕는 재료가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지금부터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는 만큼 기록도 쌓여갈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언젠가 어른이 되어, 아빠의 기록이 그들 손에 전해질 순간을 고대한다. 그림책 속 프레드릭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노트에 담긴 기록들이 언젠가 아이들이 추운 날을 견디며 지나고 있을 때 따스함을 전해줄 재료가 될 거예요." 


나는 때로 '아내의 말과 하루'도 기록한다. 아내가 보낸 하루를 적고 거기에 안 해(아내)의 컨디션이나 안 해(아내)가 했던 말을 덧붙인다. 아내와 나 사이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겨울날을 지나게 될 때도 그림책 속 프레드릭인 이렇게 말해줄까.


"노트에 모아두었던 기록은 따뜻한 햇살이 되고, 파란 덩굴꽃과 붉은 양귀비꽃 이야기가 되어 따스함을 전해줄 거예요."


기록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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