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믿음 조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v Nov 28. 2024

기억하는 자들

기름부음, 제사장, 성막

출애굽기 40장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대화’라는 단어에서 대자는 한자어로 대할 대자입니다. 이 한자어를 파자해보면, 촛대를 뜻하는 글자가 안에 숨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라는 건, 누군가를 마주하다 마음속 어딘가가 서서히 밝아지는 걸 뜻하는가 봅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동안,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형태는 아니지만, 이야기 어느 지점에서 여러분들 마음속 어느 부분이 밝아지는 순간이 있기를 바라봅니다. 

출애굽기 40장을 읽으면서 세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9절입니다. “너는 예식용 기름을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성별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성별 하여라.” 이 말씀을 보면서 궁금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성막 안을 채웠던 기구들은 어디에서 났을까라는 것입니다. 당시 광야에서 기구들을 파는 상점이 있을 리 만무했을 테니까요. 저만의 상상을 좀 더해봤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성막을 지으며 필요했던 기구들이 이렇게 모이지 않았을지 생각해 봅니다. “은실이네 가정에서 촛대를, 찬미네 가정에서 등잔대를, 경옥이네 집에서 등잔불을, 은하..... 누나네 집에서 상을 가져와 성막을 짓는데 드리진 않았을까요.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거룩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과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닌가 봅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새로 산 촛대일 필요가 없고, 한 번도 쓰이지 않았던 등잔대일 필요가 없고. 그들의 일상을 숱하게 채웠던 물건들이 성막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기름을 바르라. 기름을 바르라는 행위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정마다 소중하게 간직해 온 물건, 이집트 땅을 빠져나올 때 고이 챙겨 온 물건이면 그만으로 충분할 텐데 왜 기름을 바르라 명하셨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말씀에서 저는 ‘수고’가 떠올랐습니다. 성막 안 모든 기구들에 기름을 바르려면 여러 사람의 수고가 필요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누군가의 수고로 회막이 성별해지고 거룩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수고는 나를 위한 것을 넘어 성막을 바라보던 이들을 위한 수고였고, 성막을 함께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를 위한 수고였습니다. 나의 일상 속 어딘가에서 다른 이를 위한 나의 애씀이, 나의 작은 수고가 바로 거룩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조금 떼어 다른 누군가, 공동체 모두를 위한 곳에 사용한다면 그것이 거룩이 아닐까요. 내 귀와 마음까지 열어서 지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나의 여백에 그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거룩이 아닐까요. 공동체 모두와 나누어먹을 반찬을 만드는 것 그 수고가 바로 거룩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매주 거룩한 시간, 거룩한 교제, 거룩한 식사, 거룩한 날들을 함께 해오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장면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2절입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 부 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 그림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레드릭]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수다쟁이 들쥐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겨울이 다가오자, 옥수수와 나무 열매 그리고 밀과 지푸라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단 한 마리, 프레드릭만 빼고 말입니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프레드릭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 어느 날 들쥐들은 풀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레드릭을 보았습니다. 들쥐들이 또 프레드릭에게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프레드릭이 짤막하게 답합니다.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 또 다른 날, 다른 들쥐들이 나무라듯 묻는 물음에 프레드릭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이야깃거리가 동이 나잖아. “ 겨울이 되었습니다. 들쥐들은 모아둔 먹이로 지냈지만, 점점 옥수수도, 지푸라기도 다 떨어져 버렸고,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 사이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때 프레드릭이 돌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감아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 프레드릭이 햇살이야기를 하자 다른 쥐들은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파란 덩굴 꽃, 붉은 양귀비꽃, 초록빛 딸기 덤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들쥐들은 마음속에 색깔들이 살아나는 걸 느꼈습니다. ‘이야기는?’ 프레드릭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무대 위에서 공연이라도 하듯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프레드릭이 잘 담아놓았던 기억이 다른 쥐를 살게 했습니다. 제사장 직을 맡았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기억하는 자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았던 기억, 실패했던 기억, 그래도 하나님께 나아왔던 기억, 광야에서 아론과 아들들이 기억해 둔 것들이 재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추운 겨울을 맞이했을 때,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 사이사이에 불어와 온기가 사라졌을 때, 그들의 일상을 살게 할 재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프레드릭이 되기도, 열심히 재료를 모았던 다른 들쥐들이 되기도 합니다. 기억하는 자들이 되어 아론의 역할을 할 때도, 때로 누군가의 기억에 기대어 그때의 파란 덩굴, 붉은 양귀비, 초록빛 딸기 덤불을 떠올리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공동체를 위한, 누군가와 함께했던 나의 기억, 나의 일상이 언젠가 추운 겨울을 보낼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장면입니다. 33절 후반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다. 그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가지고 떠났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앞을 밝혀 주었다. “

그림책 한 권을 더 소개할까 합니다. [두 발을 담그고]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역시 화면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함께 낚시를 떠나는 내용의 그림책입니다. ”아빠와 함께 낚시를 갔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은 통통배를 타고요. 물결 속에 하늘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내 모습도 보여요. 오늘은 여기에서 낚시를 할 거예요.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집이 아주 재미있어요. 아빠는 낚싯대를 꺼내 미끼를 매달았어요. ‘자! 이렇게 던지는 거야!’ 아빠는 멀리멀리 낚싯대를 던졌어요. ‘아빠 오늘은 어떤 물고기가 잡힐까?’ ‘글쎄, 이제 기다려 봐야지.’ 

작은 물결들이 자꾸 생겨나고, 점점 커지다가 사라져 버려요. 물결에 비치는 하늘도, 산도, 아빠와 나의 모습도 함께. 우리는 하늘 물결이 되기도 하고, 산 물결이 되기도 하고, 바람 물결이 되기도 해요. 한참 동안을 출렁이는 물결을 보고 있어도, 하나도 심심하지 않아요. 찰랑찰랑, 휘. 물결소리랑 바람소리가 들려요. 우리는 세상의 한가운데 있는 거 같았어요. “어! 움직였다.” 아빠와 내 눈이 동그래졌어요. 휘이익!! 아이고 놓쳐버렸네. 저녁이 되도록 비어있는 물고기 통을 보니, 웃음이 났어요. ‘그래도 오늘 우리 재미있었네. 물고기야 잡아도 좋고, 못 잡아도 좋고’ 아빠가 웃으며 말했어요. ‘맞아 맞아! 잡아도 좋고, 못 잡아도 좋고’ 나도 웃으며 말했어요. 아빠와 나는 강물에 두발을 담갔어요. 찰랑찰랑, 발에 닿는 물결이 시원했어요. 두 발을 담그고. 그리고 마지막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날 잡은 물고기는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함께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던, 행복했던 시간의 추억이 내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가 된 물결 위의 세상, 그리고 그 세상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이스라엘 민족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었습니다. 이 불은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앞을 밝혀주었다고 합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떨어질 수가 없는 하나님. 함께 하는 것만으로 그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던 아빠와 아들처럼, 이스라엘 민족 가장 가까운 곳에 같이 있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도, 놓쳐버렸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빠와 함께 했었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던 추억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의 시간 동안 얼마만큼 전진했고, 어느 정도 멈춰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졌던 날도 있었을 테고, 어떤 날엔 조금 멀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언제 물고기가 잡힐지 모르고, 언제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분명히 인지했던 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빠와 함께 낚시했던 순간이 언젠가 추억이 되어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처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던 하나님의 현존이 그들에게 짙은 추억이 되어 아들에게 그 아들과 아들에게 전해졌을 겁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계셨어.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정말 가까이에 와계시는 것 같았어. 가나안이 아득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 행복했어. 꼭 기억하렴.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신단다. 너의 시간이 광야 같을지라도 말이야.”

수고와 기억 그리고 짙은 추억을 기억하며, 나의 수고와 너의 수고로 우리의 거룩을 맞이했음을, 차가운 겨울을 나게 할 나의 기억 우리의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 우리를 살게 할 하나님과의 추억 우리와 함께 있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