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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Jun 03. 2024

창세기의 세계 - 인간의 원초적 코드

죄와 악, 지옥 (3)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깃발⟩, 유치환


최선의 좋음을 지향하면서도 그 좋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 미묘합니다. 때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까지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불완전성을 보여주죠. 각 분야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들이 너무나 어려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분투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런 슈퍼맨들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벽한 최선을 다할 순 없습니다. 삶의 어떤 부분은 늘 비어있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각자의 슬럼프를 마주해야 합니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필연성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빚어내는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무엇인가 잃어버렸다는 '상실한 마음'입니다. 아쉽고 아련한 느낌일 수도 있고, 무기력하고 공허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애처로운 허전함으로 남아 남은 생의 뮤즈가 되기도 합니다. 잘하고 싶은데 도무지 잘 되지 않을 때, 좋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가 혼란 속에서 잡은 것은 신약성서 로마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죽음 후 도달하는 천국이니, 영적인 구원이니 뭐 그런 것들 다 좋지만 그게 항상 와닿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저에게 중요한 문제는, 바로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 지금 내가 느끼는 공허함이었습니다. 나의 최선에 대한 지향과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분투하다가 로마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요. 이후 전체 성경의 메시지와 수많은 묵상들이 서로 접합되고 연결돼서 지금까지 왔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글로 써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물을 팠던 마음을 담아 하나하나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엮어낼 생각입니다. 처음 이야기는 가장 먼저 상실이 출현한 곳, 에덴의 알레고리부터 시작합니다.




무엇을 '좋다'라고 지칭할까요? 쾌락을 준다고 해서 모두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마약처럼 단기적으로 엄청난 만족감을 주지만 삶을 망가뜨리는 물질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요.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대상들도 '좋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이라면 '좋음(goodness)'처럼 속성형 접미사를 붙여주기는 어렵습니다. 삶의 일부가 애틋하리만큼 아름답고 진실되었지만 현재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면 아련한 것이라 지칭할 수는 있어도 '지금도 좋은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시절에 한하여 좋았을 뿐인 것입니다. '좋았던 한 때(the good old days)'에 대한 회상은 좋음 자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좋음에 대한 찬가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상태로 살아있을 때에 한정해서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좋음은 늘 살아있고, 충만하고, 가지런합니. 간혹 삶의 고난이나 변수가 '좋은 경험'이라고 일컫어지는 것도 결국 그 이후에 좋은 삶의 현존 덕분입니다. 고난이나 변수가 있었으나 그 때문에 좋은 삶이 더 지속성 있고 힘차게 자리 잡아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어려움이 이후 더 좋은 삶을 지속하는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대 '좋은 경험'이 아닙니다. 좋음은 현재형으로만 존재합니다.


⟨창세기⟩에는 모든 것이 좋았던 시작의 시기가 등장합니다. 첫 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엘로힘)은 인간을 창조한 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에덴 상실 이전의 이야기예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 천지창조를 마친 뒤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태초(Genesis)의 세계는 좋음의 세계였고, 또한 복 받은 세계였습니다. 특기할만한 점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우선적인 명령(imperative*)이 생육과 번성, 땅에 충만함, 땅을 정복하고 다른 생물들을 다스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 이행은 '좋은' 세계를 망가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좋음의 세계를 운영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인간의 본성적 원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정복'과 '다스림'은 인간에게 독자적으로 주어진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다른 동물에게도 생명에 대한 의지와 자손 증식에 대한 지향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스림에 대한 선언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관점에서 심히 좋은 세계에는 인간의 '정복'과 '다스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복"과 "다스림"은 전제군주정에서 지배 대상을 착취하는 이미지와는 맥락상 거리가 멉니다. "정복하다(וְכִבְשֻׁ֑הָ)"는 NKJV에서 "subdue"로 번역되고 있는데 주로 땅 또는 다른 족속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개념어입니다. 우리나라말로는 '복속시키다'가 거의 완전한 대치어로 생각되며 공동체 주권이 미치는 영토의 범위를 나타냅니다. 이와 유사하게 "다스리라"에는 권력에 의한 강제의 의미보다는 주로 통치권을 나타내는 "וּרְד֞וּ"가 사용됩니다. 영어로는 "have dominion"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단어 자체의 의미를 직역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성경 전체에서의 용례를 살피면 통치의 영역이나 권한의 범위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즉, 어떤 공동체 내에서의 지배-피지배 / 우위-열위의 역학을 나타내기보다, 한 공동체의 통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또 그 통치의 권한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동일한 통치권 안에서 구체적인 지배 관계 양상을 나타낼 때는 주로 "וְלִמְשֹׁל֙(rule)"이 쓰입니다. 정리하자면 사람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으로서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배와 착취의 주종관계를 형성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모종의 통치권을 선언하고 확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어떤 통치권을 확립하라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인간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진 정복과 다스림의 명령이 '신의 형상'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능이 뛰어나거나, 사회조직적 역량이 우수하거나, 고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다스린다고 합니다. 


물론 이 본문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신의 형상이 대체 무엇이기에 다스릴 권한을 준다는 말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만물의 영장 인간의 여러 가지 특질을 사유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추상적 언어의 사용이 가능하다거나, 혹은 도구를 쓸 수 있다거나, 종교적 대한 믿음이 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질문하면 본질적인 지점을 놓치게 됩니다. 신이 인간에게 어떠한 속성을 부여했고, 그 속성으로 인해 우월한 위치에 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창조물 간의 우열을 나누는 사고방식이니까요. 우리가 우선하여 주목할 점은 "형상"의 구체적인 양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통치권의 근간을 이루는 형상은 그 형상의 자체적인 특성 때문이 아니라 신에서 유래했다는 그 사실로부터 독자적인 차별성을 지닙니다. 신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든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기로 결단한 그 주체성에 의해 다스림이 정당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통치권의 근간을 인간에게 둘 수 없습니다. 인간을 통해 확립되어야 하는 통치권은 인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열등한 존재를 탄압하는 인간중심의 통치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우주적 질서에서 기인하는 '좋은' 통치권입니다. 시리즈의 맨 처음 글에서 기독교의 신은 '좋음'의 유일한 근원지라고 여겨진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는 통치권의 개념 또한 신적인 권리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습니다. 좋은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람 스스로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신적 질서 안에서의 통치가 필요합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첫 번째 코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함으로써, 그리고 정복하고 다스림으로써 보다 나은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 되길 바랍니다. 물론 구체적인 양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상형인 연인을 만나 2세를 갖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고, 확장성을 가진 기업을 만들어서 대대손손 유지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자신만의 영감을 널리 퍼뜨려서 대중이 기념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 기구의 정점에 올라 중요한 결정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망 속에는 우리의 근원적 코드가 내재합니다. 나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꿈은 어떤 면에서 우리 각자의 최선, 좋음의 세계에 대한 열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음에의 지향성이 실제로 최선을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옥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여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의 삶의 선택을 돌아보았을 때, 더 잘 되고자, 더 좋은 삶을 만들어내고자 결정한 순간들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또는 내 가족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선택들이 나와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은 각자 잘 되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다는 사실이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토록 모든 세계가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을까요? 사실은 우리의 원초적 지향이 모든 선의 근원인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고, 신으로부터 유래되었긴 했으나 어떤 계기를 통해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설명하는 방식은 후자입니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글에서 이어서 씁니다.






*위에서 명명한 "명령"은 order이나 command가 아니라 imperative의 의미를 가진다. 이행을 강제하는 직권이 아니라, 복을 선포하는 의미에 가깝다. 즉 구약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때로 지상명령으로 번역됨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단순화하면, 위의 성경 구절은 인간의 최선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시 신적인 질서의 통치권에 대한 선포라고 할 수 있다. "너는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을 달성하지 못하면 벌 받을 거야"라고 규범화하신 것이 아니라,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의 복이 있음을 너에게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신학적 전제에 의할 때 신의 '말씀'은 곧 '존재'가 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역사적 죄악을 돌이켜볼 때, 정복과 다스림이 '좋은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의 뜻을 명분으로 하여 얼마나 많은 살육의 정복 전쟁이 벌어졌는가? 또 역사상 수많은 착취와 노예 제도가 이 말씀을 통해 정당화되지 않았는가? 환경 파괴에 대해서도 인간중심적 사고가 바로 이 교리를 통해 합리화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거부하고 반기독교도로 돌아섰나.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라도 더더욱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미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각자들을 박해한 선례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성경 앞에서 얼마나 철저히 겸손해야 하는지, 또 스스로 '절대자(對者)'의 자리에 서는 것을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소리쳐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성경의 맥락과 의도를 복원해야 한다.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신봉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교리로 절대화하면 구약에서 언약궤를 우상화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참담한 역사의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성경의 바른 해석을 정립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창조 시점 외에 신의 형상에 관한 본문으로 창세기 9:6과 신약성서 등이 있다. 신약성서는 말씀의 현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칭하고 있기에 비교적 이해가 쉬우나, 창세기 해당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라고 언급하며 신의 형상에 결부된 상호성, 공정성 등을 나타내보여 해석상 어려움이 있다.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에덴과는 다른 질서 및 명령이 들어서는데, 이에 관해 다룰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죄와 악, 지옥 (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신에게 속한 것은 곧 좋은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좋다'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애초에 신에서 유래했다는 필요충분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좋은 것들 - 지고한 사랑, 극도의 아름다움, 영원불변한 진리 등의 개념 자체가 신의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지, 그러한 개념들이 인간에 의해 창안되거나 먼저 존재하고 그 뒤에서야 신이 그 개념에 결부됐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 선택의 문제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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