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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Jun 03. 2024

죄와 악, 지옥 (2)

삶에서 한계를 보다


진정으로 내 안에서 솟아 나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헤르만 헤세



이전 글에서 죄악과 지옥은 세계관의 선택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세계관은 각자가 믿는 서로 다른 전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쟁으로 설득될 수 없으며 각자의 다름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니깐요.


그러나 세계관 자체에 대해서 선언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왜 기독교 세계관을 선택하게 되는지 밝힐 수는 있습니다. 성경을 포함해서 어떤 텍스트를 다룰 때, 근간에 있는 맥락(context)을 복원하는 작업은 세계관 자체를 훨씬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계관 자체보다 이를 선택하게 만든 제 삶의 경험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된 개인의 삶, 그리고 나와 얽혀 있는 주변인들, 그리고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일부 역사의 흔적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편린을 모아 자기 삶의 서사로 만들어나갈 수도 있지 않은가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서랍에서 꺼내 글들을 발행합니다. 





세계관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어진 환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계관을 선택하게 하는 것인가요? 나이, 인종, 성별, 부모의 경제력, 지역 등에 따라 정치성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가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같은 환경에 처한 두 사람이라도 분명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걸쳐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모종의 계기를 통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개인을 둘러싼 맥락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는 수많은 선택의 Text들을 모아보면, 그것이 하나의 Context를 이뤄감을 확인할 수 있어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고 교회 내에서 강조되는 여러 체험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기독교 세계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조용한 곳에서 신약 성경 로마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감동과 놀라움. 그것이 지금의 신앙으로 이끌었으니까요. 교회에 대한 여러 실망과 개인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의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은 바로 그 말씀과의 마주침에서 기인합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성경의 텍스트 하나하나가 그저 글자에 머무르지 않고 삶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제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설명하는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철학을 통해 배운 지식들이 무용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건조한 지식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입체감이 현존합니다. 신학을 기저로 하여 이와 연결되는 다른 렌즈에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 있다면 풍성한 양감으로 삶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절하게 느낀 생경한 진실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자율학습을 매우 강조(또는 강요)하는 목동의 입시 명문이었는데, 덕분에 거의 2년 반동안 매주 모든 시간에 대해 30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 피드백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극한의 철두철미함이 요구되는 작업이었습니다. 성격상 거짓말을 하는 것을 원체 싫어해서, 계획표를 솔직하게 작성하면서도 좋은 성과 피드백을 받으려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워낙 컸던지라, 지금 돌이켜봐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하루하루를 도전했음은 물론이고요. 


그때 진정으로 저의 한계를 마주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나름 현실적인 수준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맞춰서 살기로 다짐했는데 도무지 그렇게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획한 그 시간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그렇다고 집중력까지 보장되지는 않았거든요. 각종 매체를 멀리하면서 공부에만 집중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지만, 계획했던 분량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그냥 하는 것을 변수 없이 꾸준히 해내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요.


당시에는 이 사실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의 의지는 왜 이렇게도 약할까요? 어떻게 사람이 계획하는 대로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까요? 컴퓨터나 로봇으로 작업을 시킨다면, 계획된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해내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작업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고, 버그만 찾아 해결해 준다면 쓸만한 프로그램으로 기능할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삶에는 버그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소한 감기부터, 예상치 못한 가족의 일, 친구와 함께 즉흥으로 즐기게 되는 순간 등등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사실상 탈인간의 경지에 올라야 했습니다. 전교권 성적에도 들어보고 모든 과목에서 상당한 성취도 이루었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점이었어요.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최선의 최선이 남아있었습니다. 더 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늘 남았습니다.




'좋은 것을 위해 분투할 때 드러나는 이면의 심연.' 


공부뿐만이었을까요? 당시 저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 혈안이 된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었는데, 매일매일이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지 않는 것,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항상 용서할 준비를 하는 것, 교만하거나 남을 깔보지 않는 것, 음란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 등등 많은 말씀의 요구들이 있었습니다. 최선의 실천을 위해 아등바등하였는데 도저히 다 이루어지지 않더라고요. 갈등이 생기거나 별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생길 때, 어떻게 매번 천사처럼 착하게 온전히 품을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분노가 나를 감쌌고, 감정적 기복이 심해져 제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성에 눈을 뜨는 시기에 어떻게 건전하고 순수한 생각만을 할 수 있을까요? 대중가요도 거의 듣지 않고, 하루 종일 찬양만 들으면서 살더라도 때때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고자 하여도, 틈만 나면 넘어지는 게 저였습니다.


사실 때때로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더 노력하면 할수록, 더 아등바등할수록 오히려 더 큰 심연이 드러났으니까요. 억누른 욕구와 감정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이따금씩 기폭제를 만나면 더 큰 파도가 되어서 나를 덮쳤습니다. 놀랍게도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을 추구할수록 더 큰 좌절과 악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선한 말씀을 추구하려는 이토록 분투하는 내 안에서 이처럼 악한 생각과 마음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글쎄, 어디엔가 뿌리 끝까지 선량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둘러싼 주변환경에 따라서, 나의 컨디션에 따라서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할 내면의 소리가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자서전을 쓴다면 절대 넣지 않을, 아니 삶을 솔직히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에도 차마 담지 않을 더러운 마음과 생각들을 마주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꿈꾸는 대로,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삶' 


삶의 전반에 있어서도 최선의 실천은 요원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가요! 가족이 그렸던 청사진, 제가 꿈꿨던 미래와 진로,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니, ⟪시크릿⟫이나 ⟪연금술사⟫니 그런 주술들에 취해 끊임없이 탄탄대로의 장래를 상상하곤 하였으나 실상 삶이란 너무나 복잡해서 말하는 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끊임없이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으로 얼룩진 입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략뿐만 아니라 운이 필요했습니다. 어찌어찌 대학에 왔다고 해도 다시 또 다른 입시와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도 나만큼 열심히 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고 한정된 보상의 향방은 내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또 우리 삶에서 예상치 못한 불행은 어찌 그리 많은지요! 가족 중 누군가 아프길 바라왔던 사람이 있을까요? 긴급한 경제적 위난을 계획했던 사람은? 뜻하지 않은 갈등으로 사람과 갈라서게 되는 것도 익숙해질 법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부족한 나 자신을 탓했습니다. 노력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라며, 미봉 가설(ad hoc)을 더해 최선을 다하면 최선에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하고자 했습니다. 자기개발서들에 혹해서 구체적으로 계획도 짜보고, 사소한 실천들도 실행했으나 실상은 절대로 순탄하지 않더라고요. 물론 시행착오에서 얻는 값진 경험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꿈꾸는 최선의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꿈꾼다.' 


사실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명제에는 우리 모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죠. 처음 그 한계를 마주한 성장기에는 그것이 매우 새삼스럽게 느껴졌지만, 자기중심적 시선에서 벗어나 메타인지가 가능하게 된 성인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세계의 자연스러운 '무심함'임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두 번째 진실이 남아있었습니다.


사실 최선을 다할 수 없으면, 혹은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면 그냥 그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냥 적당히 노력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받기를 계획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저 많은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꿈꾸는 마음은 늘 제 안에 잔존했습니다. 이 마음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지금에도 쉬이 사그라들지 않더라고요. 다시 말해서 달성하지 못하는 목표를 포기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면 삼일마다 작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지금에 머무르지 않고 커리어를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좀처럼 잘 안 됨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우리 가족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더 큰 성공에 가까워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지금도 삶을 쥐고 끝없이 휘두릅니다.


잘 되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인가봐요. 물론 어떤 '좋음'을 추구할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커리어를, 다른 누군가는 가족과의 관계를, 또 다른 누군가는 예술적 영감을 전파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둘 것입니다. 하지만 각 사람에게 있어서 보다 '좋은 삶'에 대한 열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포자기했다고, 삶을 망쳐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더 나은 삶에의 의지를 마음 구석에서 완전히 몰아낸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극악무도한 사형수도 남은 하루는 더 즐겁기를 소망하고, 자살하는 사람조차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양가감정을 느끼니까요. 


설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선, 좋음, 미덕, 이데아, 초자아, 유토피아, 이상향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우리가 모두 느끼는 그 감정과 그 생각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유독 그것이 큰 문제로 느껴졌습니다. 포기할 수도 없고 달성할 수도 없는 수많은 목표들, 그리고 그 간극에서 오는 무기력과 냉소가 저를 짓누르던 시기가 있었어요. 진로, 경제적 성공, 신앙적 경건, 대인관계에서 달성불가능한 목표들이 푸코의 판옵티콘처럼 나를 감시했습니다. 완벽주의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는 키워드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그 삶의 괴리들은 해결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파했습니다.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의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나와 어떻게 타협하고 화해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스스로의 모순을 설명한 것인가, 그것이 저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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