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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Jun 03. 2024

죄와 악, 지옥 (1)

기독교적 세계관을 논하다



"떳떳하게 산 내가 왜 죄인이야?"


기독교적 이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작 버튼이 있다면, 바로 '죄인'이라는 워딩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인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쉽게 납득이 갈까요? 교회에 다니지만 삶은 개판으로 살고 있는 저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데, 나는 죄인이라 지옥에 간다니.. 참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지 충분히 의문이 생길만합니다.


대체 그들이 말하는 '죄'라는 게 무엇일까요? 흔히 지하철역에서 들리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생각한다면, 죄는 결국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나요? 이렇게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종교가 있다니,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자기네들 종교의 신을 믿지 않으면 모두 죄인이고 지옥에 간다는 이런 오만함은 어디에서 기인할까요.





죄의 개념을 말하기 앞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지옥에 가는 일차적 이유는 '죄와 악'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믿음'은 죄악을 해결하는 솔루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악지옥, 예수천국'으로 표현되는 것이 논리적 인과관계를 오히려 잘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게가 장사가 너무 안 돼서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신청했는데 솔루션을 충실히 이행하지는 않아 결국 망했다고 해봅시다. 그 가게가 망한 원인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처음부터 장사를 잘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백종원의 솔루션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아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차적 원인은 아니잖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의 개념 또한 곡해되기 쉽습니다. 지옥은 무엇입니까? 불이 타고 영원히 고통에 시달리는 추상적 세계는 모두 지옥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옥이 갖는 핵심적 의미는 '신의 부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역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다양한 단어(무덤, 구덩이, 흑암, 게헨나 등)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신과 동행하지 못하는 시간 및 공간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옥은 신이 없는 곳이라고 정의되어야 합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 된다'는 명제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입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신과 동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요. 만약 다음과 같이 지옥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훨씬 거부감이 덜할 것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과 함께하는 시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이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귀결이 왜 불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요? 그것은 지옥에 결부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입니다. 불, 고통, 벌레 등등 사람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불러일으킬만한 것들이 지옥을 묘사하는데 동원되니까요. 왜 그런 안 좋은 형상이 지옥과 결부될까요? 사실 이것은 세계관 선택의 문제입니다. 신의 존재와 속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정의되는 문제라는 것이죠.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은 서로 설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맞고 틀리고를 결론낼 수 없고, 각자 '전제'가 다르다는 점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유전자로 규정되는 생물학적 범주를 가족 개념을 구성하는 핵심 전제로 삼는 반면, 다른 사람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함께하겠다는 동의를 가족 구성의 전제로 삼는다고 해봅시다. 이 둘에게 동성의 친구 둘이서만 모여 평생 가족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물어본다면, 전자의 부정과 후자의 긍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둘이서 이야기하면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세상을 규정하는 각자의 틀, 즉,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신자 입장에서 '신(God)'은 세상의 창조자이며, 모든 '좋음(good)'의 근원입니다. 사랑, 평화, 풍요, 아름다움, 진실됨 등등 모든 좋은 것들이 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의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좋음'에 대한 거부는 곧 '나쁨'에 대한 자처입니다. 위에서 지옥은 '신의 부재'에 처하는 시공간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묘사는 필연적으로 '나쁨'으로 구성된 공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에 타는 고통이건, 슬퍼하면서 이를 가는 억울함이건, 이러한 묘사는 모두 이러한 좋음과 나쁨의 근원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짧게 기록하였지만 사상적 논쟁이 두터운 철학적 논제입니다. 플라톤주의를 수혈한 교부 철학에서부터 니체의 ⟪도덕의 계보⟫까지 수많은 참여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사상적 논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지옥을 언급하는 것은 세계관 충돌의 현장을 드러냅니다. 나는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행복하고, 즐겁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신을 믿어야만 진정으로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일신교'가 아니라, '유일신교'입니다. 능력을 가진 여러 신들이 있고, 그중에서 내가 믿는 신을 선택하는 종교가 아니라,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단 하나뿐임을 믿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즉, 절대자이자 선함과 좋음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신(God)이 여호와(Yahweh) 뿐임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그러므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전파는 '세계관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죄의 개념 또한 이러한 세계관의 충돌을 염두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너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 지옥에나 가라'라고 말한다거나, '지네 종교를 안 믿는다고 해서 사람을 다 지옥으로 보내버리려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저 세계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선함과 좋음이 오로지 인간을 척도로 생겨났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믿도록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죄와 악이라는 문제도 오직 인간의 법과 윤리를 통해서 해결을 도모하게 됩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이 모든 것이 유전자의 번영을 위한 운반장치들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믿도록 놓아두면 됩니다. 유전자의 보존을 방해하는 것들이 근본적인 죄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거나, 또는 인간 사회라는 고차원의 신기루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기준이 그 역할을 담당할테니까요. 반대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믿는 사람 또한 그렇게 내버려 둡시다. 그 사람들은 인간 사회를 초월하는 우주적, 나아가 형이상학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 실체가 좋음의 창조자라고 믿을 뿐이니깐요. 전제에 대한 믿음의 영역을 논리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도를 가장한 강요는 매우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이 행동이나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도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강압적으로 주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설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세계관을 선포하고 이에 맞춰 살기를 바랍니다. 논쟁과 말의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에 맞춰 사는 능력으로 상대방에게 믿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그러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예수 본인도 육체가 되셔서 삶을 살아내시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시지 않았는지요. 모교의 슬로건이 이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입니다. "사랑의 실천(love in action)"이 가장 기독교적인 전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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