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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Jul 27. 2024

나사로의 부활

죽은 '삶'을 살리는 역사

깊이 있는 묵상으로 들어가다 보면,

각자 삶에서 죽어 있는 영역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경우, 어린 시절부터 드렸던 기도 제목들을 돌아보면 어느 순간부터 덮어두던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했지만 좀처럼 응답이 없었던 주제들, 끊어내지 못한 죄와 딱지가 생겨버린 상처들, 함께 꿨지만 지금은 너무나 소원한 꿈들.


사실 이렇게 죽어 있는 영역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지프스처럼 열심히 삶의 돌덩이를 굴리다 보면, 이런 생각들은 모두 잊히기 마련입니다. 가시떨기와 엉겅퀴가 가득한 밭에는 열매가 온전히 자랄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쳇바퀴 같은 삶을 지나다 보면, 요즘 신앙 좋다는 사람들이 흔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잘 견디다 보면,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그날이 오겠지"




그런데 죽은 나사로를 둘러싼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믿음의 한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현대 신앙인들처럼 분명히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능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기꺼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도 있었죠. 다음과 같이 교과서적인 신앙의 응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요한복음⟩, 표준새번역

마르다에게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에서부터 나오는 끈끈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여기 있었으면 그녀가 나사로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지금이라도"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마르다의 성숙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규정하는 일정한 신앙의 틀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 :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명하신 나사로의 "살아남"을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을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현재 삶에서 나타나는 부활이라는 사건은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많은 기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우리의 기도 제목은 종종 때와 영역에 있어서 한계를 두곤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을 바꿔나가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라거나, "빨리 죽어서 천국에나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을 보면 기독교가 이렇게 염세주의, 회의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나 싶습니다. 


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영역은 정해져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두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교회 및 선교와 관련된 사항이라든지, 소위 '영혼'과 관련된 것을 다룰 때는 정말 뛰어난 믿음으로 기도하고는 하죠. 하지만 나의 '삶'을 직면한 문제에 관해서는 사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건강, 돈, 직업, 가족, 연애 등등에 있어서는 기도보다 나의 생각, 욕망, 행동이 앞서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사후 허가를 받듯이 기도하거나, 아니면 행동과 동시에 주문처럼 버프를 구하고 있지 않나요?


물론 미성숙한 '기복신앙'에서 벗어난 교인들은 그런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더 엄밀해져야 합니다. 덮어놓는 것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땅과 하늘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과 욕망을 중심으로 기도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아예 그런 삶의 구체적 향방에 대한 제대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가져와 끝까지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포기하고 회피하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면 애초에 기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나요? 그것이 당신 삶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임에도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차마 "나사로 오라버니를 지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습니다. 삶의 소망과 문제들을 가져가서 정면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셨다면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하나님 제 인생이 망가져버렸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나마 찾아볼 수 있지만, 정작 삶을 완전히 직시하고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내 삶에 죽어있는 영역을 살려달라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만 살릴 수 있다고 절박하게 고백하지 못합니다.

이는 감히 예수님의 역사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믿음이 '삶'의 영역까지 확장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을 가지신 분들은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 모두 고통에서 해방되고 결국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는 믿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삶의 주제들에 대해서도 그 믿음이 적용되나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믿나요?




물론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표준새번역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의 문제에 관하여 구하는 것을 망설이는 까닭이 되는 본문일 것입니다. 저 또한 그랬었고요. 의식주에 대한 걱정 등 삶의 문제들은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내세에 들어가는 것, 또는 그와 직접 연결되는 예배와 구원 사역만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인가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주의, 영지주의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세의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말씀하신 분은 몸소 "인자(사람의 자녀)"의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하나님의 나라가 별개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위 말씀을 하실 때 앞에서 무엇을 먼저 말하셨을까요?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삶과 결코 유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임하고,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은 삶의 문제들에 관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생존과 걱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의 관점에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을 '구별'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를 뜻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완성시킨 성육신의 놀라움이 아니던가요.


마르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교회'와 '세상에서의 삶'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들어와 있는 한 인물입니다. 그를 살리는 일이 따로 있고,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부활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한가운데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에게 삶을 살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고, 세상의 논리만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은혜의 배터리를 충전하고, 세상에 나가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나누는 말과 행동에서 사랑이, 직장에서는 화평과 충성과 같이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죠. 현대 기독교에서는 성과 속을 나누는 수도원 신앙보다 예배자로서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가정에서 겪고 있는 바로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 요즘 직장에서 느끼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잘못된 욕심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 깨우쳐주실 것입니다. 또 그것이 나의 이기심 절여진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소원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꺼이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방치한 삶의 죽은 영역들도 다시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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