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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Nov 20. 2021

베데스다 자본주의

1. 베데스다의 연못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인의 성경
요한복음 5장 1~9절 

1 그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 채가 서 있었다.
3 이 행각에는 많은 환자, 소경, 절뚝발이, 손발이 마비된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 (물이 움직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4 그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곤 하는데 물을 휘저어 놓은 다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다 나았다.)
5 그런데 거기에 38년 동안 앓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
6 예수님은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자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시고 그에게 “네가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7 그러자 그 환자는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그때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하시자
9 그는 곧 병이 나아 자리를 거둬 들고 걸어갔다. (이하 생략)

베데스다의 한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오곤 했다. 놀랍게도 그때마다 어떤 병이든 다 낫게 해주는 효험이 그곳에 생겼다.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든 낫게 해주는 마법의 샘이라니...


하지만 문제는 수혜 대상이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모두 하염없이 그곳에 죽치고 앉아있는 이유이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시작된다. 모두 아옹다옹하며 전투적으로 물에 뛰어든다. 더러는 자기보다 앞에 가는 이의 옷을 잡아끌고, 더러는 소리를 지른다. 또 누군가는 넘어져서 온몸에 상처가 나지만 악바리로 기어가기를 계속한다. 


결국 그 경쟁에서 승리하여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천국을 맛본다. 모든 병이 낫고, 인생의 숙원을 해결한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에게는 절망과 상처만이 남는다. 어제 나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던 옆사람은 오늘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나를 저지하던 사람이 된다. 인류애를 잃고 인간성을 상실했으나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들과 또다시 베데스다 못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2. 베데스다 자본주의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베데스다 못과 양상이 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환자가 되어버렸다. 베데스다 못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사치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의 문제다. 사회 안전망이 우리를 온전히 받쳐주지 못하고, 삶을 지탱하는 많은 것들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자본 획득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 쟁취하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을 담보하는 해결법으로 보인다. 자본 없이 노동에만 의지하는 것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장 위에서 곡예를 하는 것과 같다. 가족들 중에 누가 병에 걸린다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는 더욱 처절한 현실과 맞서 싸워야 한다. 아무도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 뒤쳐진 자들이 안중에 있던 적이 있을까. 우리 모두의 시선은 효험을 본 단 한 명, 그 승자에게만 가있다. 부요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모두의 귀감이 되는 선구자. 그 사람은 누구보다 노력하여 그 못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풍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빠르지 않았나. 모두에게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는데, 그 사람만이 쟁취한 것뿐이니깐.


천사는 언제 내려오는가? 대다수 경영과 노동은 베데스다의 천사가 아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많은 경영과 노동의 가치는 감소했다. 근로자들은 이전과 같이 열심히 노동을 하였으나 소득이 좀처럼 보장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경영자들은 사업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어려움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지출해야 했던 임대료를 생각한다면, 부동산은 천사의 후보임이 분명하다. 지대추구 이론은 적어도 서울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거주용 부동산도 굳건한 효도상품이다. 저금리로 풀린 돈은 당연하듯 집값과 전셋값 상승을 이루어냈다. 새로 사회에 진입하는 사람은 감히 꿈꿀 수 없는 금액이다. 부동산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 그 자체도 파죽지세를 계속한다. 주식시장과 펀드는 과열되었고, 이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제 막 소득이 생기는 20대부터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모두 이 경쟁에 참여했다. 물론 지대와 자본 외에 모든 생산요소의 가치가 감소한 것은 아니다. 특정한 사업 분야의 경영과 노동은 그 어느 때보다 부흥했다. 특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주요 참여자라고 할 수 있는 플랫폼 기업에는 엄청난 혜택이 주어졌다. 시가총액 순위를 갈아치우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 확장되고 있다.




3. 진짜 공정한가

자본주의를 변론하자면, 베데스다 못과는 달리 그 수혜자가 아주 많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변에 보이는, 매스컴에서 등장하는 성공한 이들이 얼마나 많나. 유퀴즈와 같은 공중파에, EO와 신사임당 등 유명 유튜브채널에 출연하여 우리에게 귀감을 주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보라.


또, 그들이 실제로 무진장 노력했다는 사실도 안다. 그들의 노력과 열정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각자 인생을 보자면, 누구보다 최선을 다한 이들이다. 남들보다 먼저 기회를 알아보고, 그곳에 투자하여 일궈낸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유엔 세계식량계획의 사무총장조차 일론 머스크에게 기부를 강요할 순 없다고 사람들이 강론하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베데스다와 우리 시대 자본주의 구조의 기시감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시선은 수혜자에게 가 있지 않다. 내 눈에는 구조에서 밀려난 자들이 보인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과, 역에서 방황하는 장년들이 보인다.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고달픈 회사생활을 견디는 사회 초년생들이, 육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월급을 쥐어짜내는 어린 부모들이,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도 빚 갚기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보인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였을 50여 명 정도를 상상해본다. 1/50. 자본주의에는 그보다 많은 수혜자가 있을까? 그보다 많은 수혜자가 있다고 한들, 밀려난 사람들보다 많을까?


그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 소수의 뛰어나고 운 좋은 이들 외에는 생산자본의 노예가 되어 부속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그럴 위험에 상시 노출되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래도 사회 구조는 보다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공정성 또한 의심해볼 여지가 많다. 능력과 운에 따라 자본이 배분이 되는 것은 공정한가? 자유지상주의적 지향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빨갱이처럼 대목이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능력과 운 외에 부의 배분을 결정할 지표가 무엇이 있겠는가. 과거에 사회적 계급과 인종 등에 의해 부를 배분했던 시스템을 생각해본다면, 능력과 운이야말로 훨씬 더 공정한 기제이겠지.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정말 능력과 운이 임의적으로 배분되는 것인지 되돌아본다. 이미 사회적 지위와 부가 어느 정도 계급화되어 능력과 운 또한 대물림하고 있지 않나. 부에서 나오는 교육편차, 인맥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양극화되고 분열되는 사회를 관망하는 것이 어떤 파국으로 이어질지 염려된다.




4. 늘 대안이 어렵다.

자본주의는 이미 여러 번 승리했다. 봉건 영주들을 밀어냈고, 절대군주와 귀족들로부터도 결국 독립하였다. 최후의 반역자인 공산주의도 결국 무너졌다. 시장을 거스르고 사람들의 욕구를 억압하는 모든 체제들은 결코 자본주의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시장을 존중하고 개인의 선택지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외에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부요한 자는 더욱 부요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고 한들, 이를 대체할 바람직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베데스다 연못의 구조를 방관하기엔, '이거 분명히 문제가 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네가 낫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이에 동문서답하는,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남들이 먼저 들어갑니다"라고 비참하게 한탄하는 환자에게 확실히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무엇이 구체적인 대안이 될지는 모르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레퍼런스임에는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 물어야 될 것은 우선 '우리가 낫고 싶은지'이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 싶을까? 우리 사회가 각 개인들에게 배분해야 할 자원은 무엇일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의식주를 기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차원까지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개인의 선택권을 폭넓게 인정하여 자아실현의 기회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말이다.


그다음으로는, '스스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기'이다. 반체제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구조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와 방식을 고집하지 말라는 의미다. 구조의 선봉에 설 기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초월한 개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각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의 연결성이 약화되고, 전 세계에 양극화의 문제를 대두시키며,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의 원인이 되곤 하는, 요즘 시대의 자본주의. 이 베데스다 자본주의의 끝은 어디일지. 언제일지. 또 그다음은 무엇일지... 생각이 끝없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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