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전화를 끊는다. 소리샘으로 음성메시지를 전달할 바에는 그냥 문자나 카톡으로 용건을 남기면 되니까. 보통은 저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끊곤 한다. 부재중 전화를 보면 콜백을 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소리샘으로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허공에 대고 말은 하는 것이 어색해서이다. 불러도 대답 없는 내님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사실 지금은 소리샘에 메시지가 들어와도 어떻게 확인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음성 메시지가 어색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핸드폰이 30년 전임에도 현재 프리미엄폰보다 가격이 비쌌고, 벽돌같이 어마 무시한 크기였던 그때는 모두들 삐삐를 들고 다녔다. 삐삐는 단순한 연락 수단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떤 삐삐를 들고 다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취향과 잘나감의 정도가 보이곤 했다. 나는 대체로 무난한 모양의 저렴한 삐삐를 사용했다. 잘 나가지 못하는 무색무취한 인간의 징표라고나 할까?
삐삐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들으려면 꼭 공중전화기를 이용해야 했다. 지금은 텅 비어있고, 쓰레기가 쌓여있는 공중전화 박스지만 그때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신촌이나 종로 같은 번화가에서는 공중전화기 줄이 놀이동산 롤러코스터 줄에 지지 않게 길었다. 썸녀에게서 메시지라도 오면, 메시지를 확인할 때까지 머리는 행복 회로를 돌리고, 심장은 나대고 있었다. 또, 특별한 메시지는 저장해 두고 수시로 듣곤 했다.
삐삐로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은 2가지가 있었다. 지금 카톡처럼 숫자로 된 메시지를 보내던가, 음성 메시지를 남긴 후에 연락받을 번호나 메시지 번호를 남겼다. 급한 메시지 뒤에는 ‘8282’ 같은 숫자가 쓰여있었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1818’이라던가 ‘4444’ 같은 메시지가 오곤 했다.
행실이 발랐던 나도 의외로 저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신입생 오티를 따라갔던 2학년 때 문득 내 삐삐엔 ‘18’과 ‘4’가 메시지 창을 꽉 채워 전달되었다. 메시지 창을 보고 열 받아서 사서함을 들어보면 다른 내용이 녹음되어있는 반전 같은 장난을 쳤나?라는 생각을 하며 음성메시지를 들어보니 난생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가 나에게 엄청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알바에서 만난 누나랑 삐삐로 음성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걸 남자 친구가 듣고 오해했는지 열 받아서 나한테 막 쏴댄 것이다. 그 누나와는 좀 친한 사이였을 뿐인데, 그런 메시지를 받으니 나 때문에 남자 친구랑 싸운 거 같아 미안해서 그냥 있었고, 그 누나와의 연락도 그렇게 끊겼다. (근데, 남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그런 남자와는 헤어졌기를 바란다.)
좋은 의미의 메시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수능이 끝난 후에 같이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여자 친구들도 함께 만났었다. 나만 혼자라 여자아이들이 소개팅을 시켜줬는데, 소개팅녀가 나한테 ‘38317’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그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몰랐고,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을 때도 아니었다. 그 메시지의 뜻을 알려면 서점에 가서 삐삐 암호풀이 같은 책을 사봐야 했는데, 그런 열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친구들과 그 소개팅녀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38317’의 뜻이 뭐냐고 공개적으로 물어보고 말았다.
친구들은 ‘오~’라면서 날 추켜 세워줬고, 소개팅녀는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무도 뜻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반응으로 봤을 때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았는데, 소개팅녀와는 그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38317'은 거꾸로 하면 독일어로 'LIEBE' 바로 사랑이라는 뜻이었다. 소개팅녀와 연락이 끊긴 후에 메시지의 뜻을 알고, 나에게 닥친 이 일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적 메시지를 공개된 자리에서 공개하는 바보 같은 남자라서였을까? 아니면, 그날 만남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사적 메시지를 공개된 자리에서 공개하는?)
이렇게 좋고 싫은 추억을 남겨주던 삐삐는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군대에 있을 때 PCS폰이 공격적으로 보급이 되면서 친구들은 모두 삐삐를 버리고, 휴대폰으로 갈아타서, 친구들의 연락처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휴가 나왔더니 집이 이사를 가있던 사건과 비슷한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지금은 뭐든 빠르고, 편리한 시대다. 그래도, 가끔은 메시지의 내용을 상상하며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던 그 시간들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