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p.p
지난 글 ‘신입생 오티 때는 정장을’의 처음 문장을 ‘대학에 합격하게 된 후’라고 시작했다. 그걸 본 아내가 카톡을 보내왔다.
“대학에 합격하게 된 후, 또 수동태로 썼네. 대학에 합격한 후라고 써야지. 합격은 누가 시켜준 거야?”
“대학교가”
“본인의 노고를 대학에 돌리는 거야? 왼손이 한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건가?”
“ㅋㅋㅋ 항상 겸손해서”
“하튼 웃겨”
“읽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껴야 할 텐데.”
이렇게 대화를 글로 옮겨 놓고 보니 내가 굉장히 깐죽거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매사 진중한 사람인데...
여튼, 내가 글을 써서 브런치에 저장해 두면 아내는 그걸 읽고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비문이나 문장 구성이 이상한 부분을 고치거나 의견을 준다. 그 과정에서 과거 출판업계에서 일했던 아내는 경력자의 매서운 눈으로 나의 문장 특성을 발견하였다.
바로 수동태의 대가. 학교에서 한국어는 수동태가 거의 없다고 배운 것 같은데,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수동태를 너무 빈번히 사용하고 있었다.
수동태 표현으로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키는 일은 제법 하지만 스스로 할 의욕이 없는 수동적인 인간이 바로 나 아닌가? 글이 내가 되고, 내가 글이 되는 그런 물아일체의 단계까지 도달한 듯하다.
수동태형 인간으로서 크게 욕망하는 게 없는 나는 대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맞춰준다. 예를 들어 데이트할 때는,
“점심 뭐 먹을까?”
“니가 먹고 싶은 거”
“영화 뭐 볼까?”
“니가 보고 싶은 거”
이런 것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화법이란 걸 알게 되고, 왜 인기가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하나 풀렸다.
나와는 다르게 적극적인 동생은 조금 다른 화법을 구사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치킨”
“오늘 치킨은 좀 별로지 않나?”
“그럼 피자?”
“피자 말고”
"회 먹을까?"
"그럼, 그럴까?"
동생과 메뉴를 정하려면 항상 스무고개를 하고, 정답을 맞혀내는 영광의 시간이 있은 후, 동생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동생의 이런 패턴을 알아낸 후에는 그냥 니가 먹고 싶은 걸 처음부터 말하라고 하여 시간을 절약하곤 한다.
이렇듯 대체로 상대에게 잘 맞춰주는 나에게 아내는 때때로 왜 이렇게 본인 의견이 없냐며 답답해한다. 사람의 단점은 곧 장점이기도 한데, 내 의견이 없어서 아내의 의견 반영을 잘해주는 긍정적인 면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평소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수동태의 나는 집에서도 별다른 변화를 원치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집의 모습 얼마나 좋은가? 슬프게도, 아내는 자주 가구의 배치를 바꾸고 싶어 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설치하고 싶어 한다. 내가 보기엔 전혀 바꿀 이유가 없는데, 바꾼다. 아니, 바꾸는 게 아니다. 바꾸라고 지시한다. 수동태의 나는 아내의 이런 부당한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 시키면 또 잘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돌쇠 같은 마인드로 무장하여 집에서 부리기 쉬울 것 같은 나에게 아내는 '아마따씨'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아내의 부탁에 항상 흔쾌히 대답하고, 작업의 중간 점검을 하는 아내에게 '아 맞다!'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대답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먹어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것은 부당한 지시를 받아들이기 싫은 나의 뇌가 지시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아니었을까?
나에게도 있었구나. 능동적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