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째 우울증약을 먹고 있다. 올해 약이 더 늘었다. 보라색 ADHD약과 하늘색 수면제.
다른 건 몰라도 약 하나는 꾸준히 늘고 있다.
“나를 말려죽일 셈이야?
“그만해! 그만해. 그만하라고.”
“악!”
연속 이틀 외래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달력만 봐도 한숨이 나왔고, 일부러 전날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배터리를 충전했다.
수요일, 6시에 일어나 7시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새벽부터 시작된 비는 점심이 지나도 그칠 줄 몰랐다. 할아버지를 먼저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나는 약국으러 향했다. 약을 건네고 집에 오니 2시.
“아직 2시밖에 안 되었네. 하루 참 길다.”
씻을 겨를도 없이 허물 벗듯 옷을 내던지고 속옷차림으로 입에 빵을 욱여 넣으면서 쇼츠 삼매경에 빠졌다. 머리가 핑핑 도는데 멍 때리고 싶었다.
쇼츠 화면이 갑자기 통화화면으로 변하고 발화가 시작되었다.
[내일 병원 가는 거 말인데, 13시로 되어 있는데 1시니까 11시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15시까지 가야하고 두 시간 전이니까 13시, 1시까지 가면 돼.”
[뭐라고?]
[안들려.]
“티비 끄고 이야기해”
[뭐라고 안 들려. 13시면 1시니까 11시까지 가면 되는 거ㅡ]
같은 말에 화가 치솟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허공에다가 몇 번 소리를 지르니 첫째 고양이가 와서 나를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내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화가 풀리지 않아 다시 전화하고 끊기를 반복했다. 여섯번인가 전화를 걸어 내 할말만 하고 끊은 것 같다. 사실 너무 흥분해서 뭐라 말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고 통화기록만 ‘6’이라고 떠서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게 잘 알면 혼자 다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야? 말라 죽으라고”
“답답해 디지는 걸 원하는 거지?”
“그냥 좀 가만히 좀 있으라고!”
온집안이 떠내려갈 듯 소리를 지르자 고양이들은 지영의 방으로 피신을 했다.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영이가 뒤에 온 줄도 몰랐다. 분노의 끝은 눈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늘 오후에 언니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상황을 수습해줬다. 목요일 외래는 언니가 대신 가주는 걸로 마무리했다.
[할아버지한테 너도 우울증 심하니까 질문하지 말고 그냥 믿고 따라다니라고 했어, 내일 외래는 내가 갈게.]
눈물 콧물 범벅인채로 뿌연 화면 위에 다급하게 손을 놀렸다.
[우울증? 보통 사람도 힘든 일 아니었을까?]
[아 그런 의미 아니야.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버렸다.
그리고 외래 진료도 같이 가지 못했다.
아. 또. 실패했다.
“내가 다 들었는데 언닌 충분히 설명했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방에 있으면 내가 불러도 못들으면서”
“언니가 할아버지한테 통화할 때 심각해져서 언니 방
문지방에서 다 들었어. 할아버지 목소리도.”
지영의 말에 그나마 내 분노가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후 내 마음은 암전이 되었다. 그나마 수행할 수 있던 나의 역할 마저도 내던졌다. 글을 써서 올리겠다는 첫 마음은 빛 바랜지 오래였다. 떡진 머리는 멀리서 보면 왁스를 바른듯 덩어리졌다. 방바닥엔 비듬도 눈에 띄었다.
[피규어를 사고 싶었던 날 응급실에 갔다.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사건사고가 터진다.]
나라는 돌을 모래로 갈아 버리는 것도 부족했는지 운명은 그 모래를 또 한 번 즈려 밟는 걸 서슴치 않는다.
후회와 자책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한텐 금요일 오후에 아무렇지 않은 척 갔다. 방청소를 하고 밥을 차리고. 할아버지 집에 나오는 작은 개미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꾸준히 뭔가를 해내고 싶었다, 내 삶을 기록하는 것은 쉽게 할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실패하고 한주를 건너뛰어버렸다. 그래도 다시금 에너지가 차올라서 이렇게 타이핑으로 지난날을 떠올려본다.
에너지 회복의 시작은 독서였다. 박완서의 단편집이 눈에 들어왔다. ‘해산바가지’를 읽는 순간 어떤 토닥임을 느꼈다.
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의 바라는 바가 실선처럼 쭉 이어지는 선이 되고 싶은데 항상 중간이 비어있다.
이점쇄선이 더 맞으려나. 하려고 하면 고꾸라지고 끊어지고. 의외로 기대하지 않으면 또 흘러흘러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