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에 바코드를 읽히자 수납해야 할 금액이 연이어 나온다. 설명을 듣고 싶은데 원무과는 아직 열지 않았다. 무조건 돈을 먼저 내야 하니까 수납이 만능열쇠라도 된 것처럼 카드를 꽂는다.
영수증, 도착 확인증. 손에 종이가 많아질수록 가슴이 벌렁인다. 가야할 곳이 많아질수록 머릿속 공이 이리저리 튄다. 회색빛 하늘에 구정물 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날씨가 궂은 이른 오전, 택시가 잡히지 않아 몇번이고 배차 요청을 누른다. 돈 한푼 아끼겠다고 일반 배차에 목숨을 건다.
오늘 일정은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 이후 간스캔 다음엔 진료. 피 검사 후에 건물과 건물을 넘어가야 했다.
‘아차’
더 간단한 루트가 있었는데 내 실수로 할아버지가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겼다. 동선이 꼬였다. 미안한 마음은 뾰족하게 나타난다.
“운동하고 좋지. 뭐.”
헤매면 두번 걷게 만든다는 생각이 나를 뒤떠민다. 열 걸음은 앞에서 주변을 정찰한다. 미어캣처럼 좌우를 돌아다보며 살피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거지. 모.”
“타던대로 다니지 왜 이리로 와서 나 힘들게 하냐”
할머니는 짜증을 잘 내긴 해도 궁금증이 적었다.
“이게 더 편할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목소리가 크고 궁금증도 많아서 날 더 예민하게 만든다.
“어디로 가는 거냐?”
“무슨 검사?”
“이리로 가야 하는 거 아냐?”
귀도 좋지 않아 이쪽도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피검사!! 그다음 초음파!!”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가슴이 곧장 답답해지고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마스크를 썼는데 공연히 목소리가 막히니 괜히 더 목을 쥐어짜듯이 말해야 했다. 긴장한 몸이 한숨을 토해내며 이완하려 하지만 또 한편으론 할아버지가 내 눈치를 볼까 참아보려 했다.
“나중에 말해, 지금 힘들어.”
돈을 내고 종이에 따라 움직이고 또 사람보다 숫자와 종이가 먼저 사람을 증명해준다. 접수 확인을 하고 대기하는데 주변엔 부모님 또래가 많다. 예전엔 이 속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대기 앞에 세 명”
“딸인가? 잘 챙겨주네.”
중년의 아줌마가 나의 통보를 낚아 채고, 항상 자기 피알에 목마른 할아버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손녀. 내가 36년생인데.”
큰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시작하면 나의 수치심이 비례해서 올라간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자기의 병력을 훈장처럼 늘어놓는다.
‘빨리 불렀으면.’
대화는 끊길 줄 모르고 이어진다. 이내 맞은 편 문이 열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우리를 부른다. 문하나 사이를 두고 다른 차원에 온 기분이 든다. 숨이 또 한 번. 주먹 같은 덩어리가 목구멍에서 치솟아 오르려고 한다.
“별다른 특이사항 없고요. 드시던 약 그대로 드릴게요. 6개월 뒤에 뵙는 걸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흡사 티켓팅을 하는 기분. 팬싸컷이란 게 이런 건가.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알 수 없다. 나는 더 말하고 싶은데 다음 턴이라고 밀쳐진 것만 같다. 정말 괜찮은 건지, 현상유지인 것인지, 나이 대비 그냥 추적 관찰을 한다는 건지. 할아버지에게 소리지른 게 무색하게 말 한마디 내지 못하고 나왔다.
“여기서 기다려 약국 다녀올게.”
할아버지를 입구 근처 의자에 앉히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약국이 바글바글한 거리에서 할아버지가 특히 선호하는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에서 한보따리를 챙겨 나와 집으로.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데 조바심이 계속 났다.
택시가 모든 배경을 뒤로 물린다. 세련된 건물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간에서 반나절을 보냈는데 녹초가 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곧장 앉아 리모콘을 찾는다. 병원에 갔다 온 건 숭덩 잘라내고 일상을 이어붙인다.
“갈게요”
“수고했다.”
건조한 인사가 오가고 문을 닫았다. 집에 가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려야지. 무엇보다도 이 떡진 머리를 감아내야지.
집에 들어온 순간 드디어 나의 차원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면서 했던 다짐들은 사라지고 없다. 일단 방바닥에 눕는 게 먼저다.
그렇게 해가 저물 때까지 책상 앞에 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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