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에 추를 하나 올리면 한쪽으로 기운다. 평형과 안정이 깨진다. 추를 올릴 수록 더욱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이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저울 자체가 엎어진다.
반지하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했던 옛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의 보호자이자 양육자의 역할을 해줬다.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색하게 내게 할머니는 엄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맨날 술 먹고 욕하고 할머니를 때리던 사람이었다. 문장 끝은 항상 비속어로 끝나는 게 일상인 삶. 욕과 고성이 오가고 밥 먹다가도 수틀리면 상도 엎어지는 집, 이런 삶은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풍채도 좋은 편이었다. 왜소했던 내게 할머니는 항상 올려다보 존재였다. 턱과 콧구멍이 잘보이고 얼굴보다는 할머니의 두툼한 손에 눈길이 더 편하게 가는 그런 키 차이. 때리기 딱 좋고 맞기에 딱 좋은 그런 포지션. 우리는 그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할머니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아지기 시작했다. 반면 식탐이 심했던 나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할머니의 정수리 사이에 자라난 흰머리가 더 잘보이고 어깨에 묻은 티끌이 쉽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를 감싸고 있던 그 허술한 울타리, 엉성한 보호막도 사라졌다.
관계의 역전은 감정이 격해질 때 비로소 체감되었다. 나를 때리던 이들이 나에게 더이상 손찌검을 할 수 없었다. 감정에 치받으면 손목을 제압하며 소리질렀다.
“제발 좀 그만 때려!”
폭력에서 해방되었지만 내게는 부채감과 책임감이라는 추가 늘어났다. 내복바람으로 한겨울에 쫓겨난 느낌, 깨끗하진 않고, 거칠어도, 눅진한 그 품에 있고 싶은데 끄집혀 나온 아기 캥거루처럼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픈 할머니를 돌보고 병원을 동행하고 수발을 드는 일. 눈물과 불안감, 물리적 폭력이 없을 뿐 상황은 내게 폭력적이었다. 같은 대학생인데 누군가는 녹음 가득한 교정을 누비고 나는 병원 안내문을 들고 번호표가 뜨기를 멍하니 기다린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기준과 보통의 개념을 체득했다. 다수가 속한 보통에 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깨달았을 땐 0점이 일그러진 저울이었다.
마음과 몸은 설익은 감처럼 쉽게 떨어졌고, 지면에 닿는 순간 터지는 것처럼 푹 터졌다. 하루에 한 번 머리를 감았는데 이틀에 한 번, 그것도 안 되면 머리를 질끌 묶고 앞머리만 감거나 세범 파우더를 묻혀 기름기를 없앴다. 옳게 벗은 양말 한 짝과 뒤집힌 양말 한쪽이 방에 나뒹굴고 수챗구멍은 머리카락으로 가득했다. 눈물로 지새우는 일이 많았으면서도 몸을 이끌고 보호자 역할을 해내야 했다. 부채감과 책임감을 갚아가면서 동시에 손바닥에 올라온 약알은 늘어났다. 고혈압, 당뇨약을 매일 먹는 노인처럼 일어나자마자 약봉투를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한 약봉투는 방 여기저기에 널부러졌다.
노력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한 번도 쓰다듬어진 적 없는 머리는 항상 그 두툼한 손길을 기다렸는데 이젠 그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쓸데 없는 말 말고 와서 티킴닭이나 먹어라!”
섬망 증세를 보인 할머니가 응급실에서 내게 마지막을 한 말이다. 그리고 하루만에 할머니는 떠났다. 내게 마지막까지 치킨을 권하던 할머니. 할머니가 떠나고 남은 자리는 의사에게 조금 더 강하게 고통과 아픔을 어필하지 못한 자책이 꿰찼다.
그렇게 잠깐 자유의 시간이 왔다. 할아버지와는 소원했고 앞으로도 요원할 거라 생각했다.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나는 할아버지 집을 다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지팡이 소리가 익숙해졌다.
“딸랑거리는 거 떼면 안 돼? 시끄러워.”
“왜 듣기 좋구만.”
예전보단 낫지만 지금도 내 방은 휴지와 뜯은 약봉지가 널부러져있는데 할아버지 방은 매일 걸레질 하기에 바쁘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과자나 빵으로 끼니를 떼우고 마는데 할아버지 집에선 설거지가 익숙하다.
연민이 더 짙었던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를 돌보는 건 미묘하다. 아빠의 얼굴이 계속 겹쳐보이고, 할머니를 통해서 들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험담이 아른거린다.
“할머니가 해준 반찬이 맛있었는데. 다 맛이 없어.”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잘했어야지. 할머니한테.”
욱한 마음은 할아버지의 양심을 찔러본다. 그렇게 가득 쌓인 돌봄의 추와 일그러진 저울에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바뀔리 없는 그 저울을 한 번 흔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