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가"
1. 장면
그 집에는 싱아가 있었다. 마당 한쪽에 아무렇게나 자라던, 시큼하고 억센 풀. 화자는 그것을 기억한다.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오빠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을 돌린다.
자전적 서사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핵심 장면 앞에서 멈칫거린다. 싱아의 맛, 골목의 냄새, 어머니의 손끝은 선명하게 복원하면서, 전쟁 중 오빠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문장이 흐려진다. 이 불균형이 이 작품의 진짜 서사다.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느냐.
2. 명명
프로이트는 이것을 억압이라 불렀다.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오래된 방어기제.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이 의식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그 문을 닫아버리는 작동이다.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억압은 '잊어버리기'가 아니다. 잊는다는 것은 기억이 소멸하는 것이지만, 억압된 기억은 소멸하지 않는다. 의식의 표면 아래에 고스란히 남아서, 다른 형태로 올라온다. 꿈으로, 실수로, 몸의 증상으로, 혹은 엉뚱하게 선명한 다른 기억으로.
싱아가 바로 그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의식이 받아들이지 못할 때, 마음은 그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대신 같은 시간대의 감각 — 풀의 맛, 흙의 냄새, 골목의 온도 — 을 과잉으로 선명하게 만든다. 기억나지 않는 것 옆에, 너무 잘 기억나는 것이 나란히 서 있다. 이 불균형이 억압의 서명이다.
3. 독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왜 억압이었을까. 같은 고통 앞에서 사람마다 다른 방어기제를 선택한다. 화자는 오빠의 죽음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고(투사), 전쟁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도 있었고(합리화),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부정). 왜 하필 기억 자체를 밀어내는 방식이었을까.
답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화자의 기억 방식에 있고, 다른 하나는 오빠의 죽음 이후 화자가 놓인 상황에 있다.
먼저 기억 방식이다. 이 자서전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개성 시절의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싱아의 맛, 마당의 흙, 골목의 냄새. 아이는 세계를 감각으로 저장한다. 언어가 아니라 맛으로, 논리가 아니라 냄새로. 이 감각 중심의 기억 방식은 성인이 된 뒤에도 남는다. 세계를 감각으로 저장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이 밀려날 때도 감각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싱아의 시큼한 맛이 이상하게 선명한 것은, 그 맛이 개성 시절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오빠의 죽음이 밀려난 자리에 올라온 대체 감각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기억 방식이 억압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다음은 상황의 구조다. 오빠의 죽음은 1·4 후퇴 전후 서울에서 일어난다. 화자는 스무 살 무렵이다. 아이가 아니다. 언어가 있고, 사고력이 있고, 세계를 분석할 능력이 있는 청년이다. 그렇다면 합리화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살아남은 내가 오빠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 이런 논리를 구성할 지적 능력은 충분했다. 투사도 가능했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오빠를 죽인 자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어기제들이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감정을 처리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합리화는 논리를 세울 시간이 필요하고, 투사는 분노를 느끼고 방향을 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부정조차 현실을 밀어내기 위한 심리적 여유가 필요하다.
오빠가 죽은 뒤 화자에게 그 시간은 없었다. 폭격이 쏟아지는 전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잔인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상의 생존이다. 점령과 수복이 반복되는 서울에서, 오빠를 잃은 가족은 다음 날부터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하고, 어머니를 돌봐야 하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전쟁의 상흔이 가장 깊은 시기에, 슬퍼할 시간은 오지 않는다. 애도할 여유가 없다.
이것이 억압의 핵심 조건이다. 감정을 처리할 시간이 없을 때, 마음은 감정을 처리하지 않고 밀어낸다. 의식의 문을 닫고, 나중을 위해 — 혹은 영원히 — 기억을 문 뒤에 둔다. 억압은 감정 처리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 처리의 유예다. 지금은 안 된다. 지금은 살아남아야 한다. 슬픔은 나중에.
그런데 '나중'이 오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안전이 확보된 뒤에도, 한번 닫힌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억압의 관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닫은 문을 평화 시에 여는 것은, 전쟁 때의 공포를 평화 속에서 다시 겪는 것이다.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난다. 화자는 어른이 되고, 작가가 된다. 자전적 서사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오빠의 죽음 앞에 오면 여전히 문장이 흐려진다. 대신 싱아의 맛이 올라온다. 개성의 냄새가 올라온다. 유년기의 감각이 성인의 기억을 대신한다. 아이 때 형성된 감각의 기억 방식이, 수십 년 뒤의 자서전에서도 억압의 대체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놓인 위치도 중요하다. 화자는 목격자다. 오빠가 죽는 것을 보았지만, 화자의 몸이 직접 공격받지는 않았다. 이 위치가 억압을 가능하게 한다. 14편에서 다룰 해리와 비교하면 이 차이가 선명해진다. 몸이 직접 침범당할 때 — 특히 반복적으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 기억을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의식 자체가 몸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이 해리다. 그러나 목격자에게는 몸의 온전함이 남아 있다. 보았지만 당하지는 않았다. 이 경우 기억을 밀어내는 것으로 방어가 성립한다. 기억 속에서 자기 몸은 온전하니까. 밀어내야 할 것은 본 것이지, 겪은 것이 아니니까.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고 했다. 그 회귀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감각의 파편으로, 무관해 보이는 연상으로,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로 조금씩 돌아온다. 박완서가 선택한 자서전의 형식 — 감각에서 출발해 사건으로 천천히 접근하는 구조 — 은 억압의 해제 과정을 형식 자체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나선형으로 가까이 갔다가 물러나고, 다시 돌아서 조금 더 가까이 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오빠의 죽음을 서술하는 대목이 아니다. 그 직전, 기억이 열리기 직전의 망설임, "이 다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류의 문장들이다. 억압이 풀리기 직전의 떨림. 마음이 문을 닫고 있다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 순간에 이 작품의 심리적 무게 전체가 실려 있다.
4. 돌아봄
우리는 모두 싱아를 하나씩 갖고 있다. 정작 중요한 기억은 흐릿한데, 그 옆의 사소한 감각만 이상하게 선명한 경험. 어떤 노래를 들으면 이유 없이 목이 메는 경험. 특정 장소를 피하게 되는데 왜인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경험.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박완서의 화자에게 수십 년이 걸렸다. 그 시간은 실패가 아니다. 억압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야 하는 시기에 마음이 선택한 유예였다. 오빠가 죽은 다음 날에도 생계는 계속되어야 했고, 슬퍼할 시간이 없을 때 마음은 슬픔을 잠시 맡아두었다. 다만 '잠시'가 수십 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수십 년 동안, 아이 때 감각으로 세계를 저장하던 방식이 어른의 기억 안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싱아의 맛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그 맛이 사라진 기억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지 않아도 된다. 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시작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구조를 기억할 수 있다. 캐릭터에게 억압을 부여할 때 핵심은 트라우마의 크기가 아니라 두 가지 조건이다. 첫째, 감정을 처리할 시간이 있었느냐. 전쟁, 재난, 갑작스러운 상실 뒤에 생계가 급박하게 이어지는 상황 — 슬퍼할 틈이 없는 환경이 억압의 조건이다. 둘째, 경험의 위치가 어디였느냐. 목격자인가, 당사자인가. 본 것이지 당한 것이 아닌 경우, 기억을 밀어내는 것으로 방어가 성립한다. 만약 캐릭터의 몸이 직접 침범당했다면, 억압으로는 부족하고 더 극단적인 방어 — 격리나 해리 — 로 가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억압된 기억이 돌아올 때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가는, 그 인물이 세계를 저장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감각으로 세계를 저장하는 인물에게 억압된 기억은 감각으로 돌아온다. 맛으로, 냄새로, 소리로. 언어로 세계를 저장하는 인물이라면 말실수로, 꿈속의 문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억압이 만드는 대체물의 형태가 인물의 감각 세계를 드러낸다. 이것을 설계하면, 억압하는 캐릭터에게 고유한 질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