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너무하다. 못 살아도 못 살아도 너무 못 산다. 태국 방콕에서 만난 여행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국경 도시인 포이펫에 도착하였을 때 처음으로 가진 생각이다.
동남아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저렴한 물가 덕에 나름대로 ‘돈 쓰는’ 맛이 있다. 그러나 그래도 조금은 살만한 나라에서야 마음껏 즐기면서 여행을 하겠지만 캄보디아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너무나 힘들게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관광객으로서의 방문이지만 마냥 즐기기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더 어린 동생을 업고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동냥을 더 쉽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식의 팔이나 다리를 자른다는 이야기를 씨엠립에서 만난 한 아저씨에게 듣고는 그런 마음이 더 심해진다. 사실 구걸하는 아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보아왔고 아이들도 ‘구걸하는 데는 여우’라는 말이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볍지 못하다.
‘그래 나는 여행 왔으니까 이런 생각은 접어두자’라고 마음을 먹어본다. 그리고 숙소에 와서 더운 날씨에 앙코르와트를 보러 가기 전에 휴식을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우연히 인천공항에서 사 온 김혜자 선생님의 빈민 구호사업 경험을 적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은 탓인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인가. 나는 단지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말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일까. 부모님의 자식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직장의 일원으로 그냥 그렇게 열심히 살면 그걸로 다 된 것일까.
그러다 읽지 않아도 될, 아니 마치 읽어서는 안 될 책을 읽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악과를 한 입 베어 먹은 걸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온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선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난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네오도, 'The One'도 아닌데…. 빨간 알약을 선택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는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인생의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러나, 그런데 왜? 유적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찾아와 저녁에 숙소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나. 그리고 동전 몇 푼이라도 얻어 보려고 손을 벌리는 아이들. 그렇다면 나와 아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내가 그들에 비해 무엇이 나아서 이런 호사를 즐기는 것인가.
캄보디아에 머무는 동안 많은 아이들이 기념품을 팔거나 구걸하기 위해 우리에게 달라붙는다. 그들이 처음에 부르는 가격은 당연히 바가지다. 아이들에게 돈을 쉽게 주게 되면 앞으로도 학교를 가지 않게 되고 다음 여행자도 바가지를 쓰게 되니 삼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아이들이 학교는 가야 한다. 하지만 당장 오늘 저녁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학교 문제가 더 급한가. 일단은 오늘 끼니를 넘겨야 내일 학교를 가든 안 가든 할 것 아닌가. 결국 알면서도 속아주고 몇 푼이라도 주게 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 돈으로 이 아이가 오늘 저녁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런 기억들은 계속 내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내 삶을 희생해서 남을 도울 만한 위인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여유를 남과 나눌 정도의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 듯하다.
지금은 약간의 돈이지만 자선단체를 통해 아프리카 잠비아에 사는 무니크와라는 아이의 후원자가 됐다.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아이를 돕고 싶다. 큰 부담도 아니다. 술 한번 덜 마시면 된다. 또 레스토랑에서 식사 한 끼 할 돈이면 충분하다. 한계 효용은 머릿속으로 계산해보아도 쉽게 계산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