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서 뭐라도 해야 하고,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두 사람 이야기
나오는 사람들
남자_불안해서 뭐든 해야 하는
여자_불안해서 익숙한 곳에 머무는
막이 오르면, 무대 중앙에 A형 사다리 위에 여자가 보인다.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불안한 표정이다. 무대에서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옮긴다. 짐을 옮기고 또 옮긴다. 쉬면 큰일 날 것처럼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남자
(계속 움직이며 짐을 옮긴다) 아, 힘들어…
여자
(사다리 위에서) 힘들면 쉬어!
남자
쉬면 더 힘들어!
여자
쉬는데 왜 힘들어?
남자
마음이 힘들어! 남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여자
다 열심히 일하는 건 아냐.
남자
세상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잖아.
여자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남자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무서워. 소리 없이 쉬지도 않고, 훅훅 지나가는 시간…
여자
무섭지.
남자
뭐라도 해야, 덜 불안해. (계속 움직이며 짐을 옮긴다)
여자
뭔 짐이 그렇게 많아?
남자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다 필요한 것들이야.
여자
아, 책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남자
(사이) 요즘엔 좀 이상해. 책을 읽고 있으면, 또 다른 책이 생각나. 저것도 읽어야 하는데. 유튜브로 강의를 듣다 보면, 또 다른 강의가 생각나. 아, 저것도 들어야 하는데. 일을 하면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걱정하고 있어.
여자
아침 먹으면서 점심 걱정하고, 점심 먹으면서 저녁엔 또 뭐 먹지, 걱정하는 것처럼.
남자
언제부턴가 그래..
여자
아, 피곤해.
남자
뉴스를 잠시라도 놓치면 괜히 안절부절못해. 그래서 보고 또 보고, 본 거 또 보고. 마셔야 할 때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불안한 것처럼.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면 눈이 침침하고, 안 보면 마음이 찜찜하고 그래. 사실 뉴스라는 게 죄다 안 좋은 소식밖에 없잖아.. 기후 위기에, 이상 기온에, 배가 뒤집어지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집값은 오르고, 전세 사기는 극성이고, 묻지 마 폭력에, 정치판은 늘 싸우고... 좋은 소식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라도 뉴스를 안 보면 막 불안해.
여자
난 뉴스를 보면 더 불안한데…
남자
(사이) 근데, 넌 왜 그래?
여자
응?
남자
왜 거기만 있어? 움직이지도 않고.
여자
여기가 편해.
남자
답답하지 않아?
여자
익숙해졌어.
남자
답답한 게 어떻게 익숙해져? 답답한 건 답답한 거야.
여자
난 새롭고 낯설면 숨이 막혀. 익숙하지 않은 건 힘들어. 불안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남자
그러다 혼자 고립되면.
여자
어디에 갇히는 것도 고립이지만, 광장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고립이야. 난 밖에 나가면 길을 잃어. 내가 갔던 길도 되돌아오지 못해. 늘 있던 곳에 내가 있는 것이 편안해. 늘 보던 것을 보는 게 좋아. 늘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야 안심이 돼.
남자
근데 얼굴 표정은 어둡다.
여자
잠을 잘 못 잤어. 며칠 째…
남자
왜?
여자
무서워서.
남자
뭐가?
여자
며칠 전에 집주인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갔어.
남자
그게 다야?
여자
왜 지나갔을까?
남자
그냥 지나갔겠지.
여자
그냥 왜?
남자
그거야 모르지.
여자
난 여기가 익숙하고 좋은데… 여긴 내 집이 아니잖아. 그래서 불안해.
남자
집은 많아.
여자
하지만 내 집은 없어. 난 여기가 내 집인 줄 알았어. 그래서 여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어. 내 몸은 이미 이 집에 맞춰져 있어. 계단 하나하나,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것에 내 몸이 맞춰져 있어. 근데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 뒤로 하루하루가 불안해. 계속 집주인 눈치만 보고 살아.
남자
너도 하루가 피곤하구나.
여자
너도 하루가 피곤하잖아.
남자
몸은 피곤해도 마음만은 편했으면 좋겠어.
여자
그런 날이 올까?
남자
낮이 가고 어둠이 찾아오면.
여자
어둠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오겠지.
남자
불안한 하루는 다시 시작되고…
여자
잠시라도 쉬어…
남자
그랬으면 좋겠어. (다시 짐을 옮긴다. 마치 첫 장면처럼) 인생 힘들다.
여자
힘들면 쉬어..
남자
쉬면 더 힘들어.
여자
쉬는데 왜 힘들어?
남자
마음이 힘들어! 남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여자
다 열심히 일하는 건 아냐.
남자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여자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남자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무서워. 소리 없이 쉬지도 않고, 훅훅 지나가는 시간…
여자
무섭지.
남자
뭐라도 해야, 덜 불안해. (계속 움직이며 짐을 옮긴다)
여자
이렇게 집에 가만히 있어야, 덜 불안해.(가만히 있는다)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막-
# 후기
바쁘게 살 때는 시간이 없어 불안했는데, 시간이 생기니 뭘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글을 안 쓰고 있자니 써야 할 것 같아서 불안하고, 글을 써보니 잘 썼는지 불안하다. 브런치 빈 여백을 바라보는 게 불안했는데, 글 한 편 올리니 잘 올렸는지, 불안하다.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