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겨울 향이 난다. 누군가 계절 향이 있냐며 코웃음을 칠지 모르지만, 매년 이맘때쯤 형용할 수 없는 계절 냄새를 느낀다.
벌써 한 해의 끝을 본다는 게 헛헛하기도 하며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올해 초에 친구랑 작성했던 버킷리스트 종이를 바라보며 뿌듯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난생처음 시도해 본 봉사활동, 열심히 등산하고 나서 먹는 누룽지 백숙 맛보기, 좋아하는 운동 찾아다니기 등. 소소해 보일지라도 온전한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나만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아직 지키지 못한 버킷리스트를 두 달 안에 이룰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며 설렌다. 달성할 목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은 일상을 평범히 보낼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같다.
나의 버킷리스트 소식을 들은 타인들은 아직 남은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나는 부끄럽다는 말 한마디로 대화를 종결한다. 맞다, 남들에게 들려주기에는 평범하면서도 거창한 목표라서 쑥스럽다. 아마 올해 안으로 달성하게 된다면 내년에 또 다른 글로 이야기를 술술 이어가지 않을까 싶다.
최근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다이어리 이야기가 나왔다. 벌써 다이어리 시즌이라니, 좀 이른 감이 없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웬걸 서점가에는 내년 다이어리 할인이 진행 중이다. 누가 봐도 연말이 성큼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여기서 질문하자면,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인가? 맞다. 새해가 다가오면 잊지 않고 새 노트를 마련하는 편이다. 그러나 꾸준히 쓰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은 늘 똑같다.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를 빠짐없이 써야 완벽한 다이어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뭐 그 생각이 변함없지만, 매일 쓴다는 건 아주 고된 일이다. 오히려 압박감에 벗어나자 기록하는게 편해졌다.
지난 다이어리가 주는 힘은 상당히 크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자서전이다. 산정하기 힘든 값어치를 지닌 노트를 바라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종종 예전에 쓴 일기를 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때 당시 불안정한 미래에 두려워 흘려 썼던 일기를 보면 현재는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한다. 운좋게 일이 잘 풀렸기에, 묵혀둔 감정은 가볍게 보낼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위로가 되어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 사소한 걸로 토라져 있을 때마다 기록을 되돌아본다. 어려운 역경을 견딘 지난날을 회상하며 오늘 일이 별거 아닌 듯한 일로 넘기며 위로한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읽으며 좋았던 문장을 다이어리 앞면에 새겨놓는다. 우리는 우주라는 광활한 스타디움에 작은 먼지일 뿐이라는 이 문장은 넘어질 듯 말 듯한 나를 바로 잡아준다. 앞선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만들어주는 마음의 뿌리 같은 문장이다.
3년 동안 꾸준히 작성한 필사 노트는 나의 평생 재산이자, 어느 것과 맞바꿀 수 없는 물건이다. 가끔 잘 가던 길이 막혀있을 때마다 노트를 펼쳐보곤 한다.
많은 책 그리고 여러 저자를 간접적으로 접하며 그들의 노하우를 한 권의 노트로 옮긴 셈이니, 강력한 인생 무기가 되어준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이 현재 풀리지 않는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줬을 때,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그럴 때마다 기록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절절히 느낀다.
나에게 기록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꽤 단순하다. 오랜 시간 기억하기 위해서다. 단, 조건을 부여하자면, 디지털 기록이 아닌 아날로그 기록이다. 빳빳한 종이에 한 손으로 꾹꾹 펜을 눌러 잡으며 써야 한다. 모든 오감을 자극한 기록만이 오랫동안 몸 안에 남는다.
종이의 질감과 나무 향, 쾌쾌한 잉크 향 그리고 볼펜의 농도까지. 꽤 사소한 요소일지 몰라도, 기록했던 노트를 보면 그때 당시가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다. 기록의 힘이란 인간의 모든 감각을 끌어오는 위대한 힘일지도 모른다.
글을 마무리할 겸, 이실직고하자면 최근 2개월 동안 다이어리 작성을 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다.
다시 기록의 힘을 믿고 나가고자 이 글을 작성하게 됐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하는 나날이 많아졌으면 한다.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한 장 가득 빼곡히 쓸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며 다시 오래된 펜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