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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Dec 03. 2024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

영화 위키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에 대한 것을 들을 때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누군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거나, 평소 그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난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될 때이다. 똑같은 사람에 대해 주변의 반응과 평가가 엇갈릴 때 나지막이 하는 소리가 있다.


‘그 사람 나한테는 안 그랬는데…….’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


 

영화 <위키드>는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영화의 후반부 그 반대가 되기도, 부정적 감정을 가진 이가 점점 끌리는 매력을 가진 이로 변하기도 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영화의 주인공인 ‘엘파바’는 피부색이 초록색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외면받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엘파바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약을 먹었다가 걸을 수 없는 딸 ‘네사로즈’를 낳는다. 아버지는 네사로즈가 걷지 못하는 이유를 모두 엘파바의 탓으로 돌리며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남들과 피부색 하나만 다를 뿐인데 엘파바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며 차별하는 아버지지만, 네사로즈의 장애는 아무 편견 없이 대한다. 걸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학 선물로 아름다운 구두를 선물해주는 아버지를 보면, 휠체어를 타는 건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라는 시각을 갖게 한다. 과연 그녀의 아버지는 어떤 인물인가.


쉬즈 학교의 교장 ‘모리블’은 입학식 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엘파바가 건물 내부를 훼손한 것을 두둔하며 그녀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인물이다. 안 그래도 피부색으로 인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엘파바를 공개적으로 보호하며 개인 레슨을 권하기도 하는 교장은 이보다 더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진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뒤바뀐다.





그런가 하면 끝으로 갈수록 점점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해가는 인물도 있다. 바로 ‘글린다’가 그렇다. 극의 초반 그녀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은 단지 주변의 시선이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돕고 상냥함을 유지하는 그녀는 엘파바를 은근히 배척하고 무시한다. 하지만 무도회장에 혼자 남겨진 엘파바를 위해 함께 춤을 추며 그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한 글린다는 이후 엘파바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영화는 어디에도 인물의 모습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지 않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며 인물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들여다보며 차별과 혐오를 해왔음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로써 인간은 본래 선하거나 악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주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누군가가 멋대로 판단해버린 모습에 갇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법사는 정말 마법을 부릴 수 있었나


 

자신의 마법 능력을 알게 된 엘파바에게 교장 모리블은 오즈의 마법사를 소개해 준다.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엘파바는 글린다와 함께 그가 있는 ‘에메랄드 시티’로 향한다.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떠난 여정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만난 마법사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모리블과 함께 모두를 속이며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숨겨온 그들은 엘파바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이때 모리블이 동물들을 선동하며 엘파바를 악의 인물로 몰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옳지 않은 것에 가담하지 않는 인물을 오히려 배척하고 어려운 이를 돕고자 하는 태도를 사악한 마녀로 몰아가는 핵심 세력과 그것에 금세 동조하는 군중들, 진실이 무엇인지 파헤치지 않고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대다수는 한순간에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재생산한다.





영화 <트루먼 쇼>는 트루먼이라는 사람의 삶을 방영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드러낸다. 그의 삶을 하나의 방송으로 여긴 시청자들은 모든 걸 알아버린 트루먼의 탈출에 환호하지만, 동시에 방송이 중단되자 '다른 볼 거 없나?' 하며 무표정으로 채널을 돌린다. 열광하는 것도 쉽지만 그만큼 잊는 것도 쉬운 대중의 반응을 통해 마법사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진실보다 중요한 건 사회적 기반과 단순한 재밋거리일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일은 너무 쉽고 편리하다. 특히 말하는 대상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 쉽게 불안해지고, 인정받지 못하는 의견에 빠르게 위축되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자와 나아가는 자


 

다만 쉽게 현혹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로 인해 사회는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해왔다. <위키드>의 엘파바와 글린다는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 뜻은 같았다. 피부색으로 인해 늘 차별받고 살아왔던 엘파바는 약자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반대세력에 용감히 맞서는 방식을 선택한다.


글린다는 함께 가자는 엘파바의 말은 거절했지만 그녀의 길을 응원한다. 친구가 춥지 않게 망토를 둘러주며 행복을 바라는 글린다의 모습은, 부조리함을 주체적으로 타파하는 것은 아니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영화가 사회적 문제를 꼬집고 더 나은 방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지라도 이러한 메시지를 접한 관객이 현실로 돌아가면, 영화에서 비판받았던 것을 여전히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수자 차별’, ‘맹목적 믿음에 따른 군중심리’, ‘다름에 따른 편견’에 관한 영화는 매년 나오며 우리는 영화관에서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고 반성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실제 사회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한계를 뛰어넘고 중력을 거스른다는 담대한 뜻을 가지고 높이 날아오르는 엘파바를 통해,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받고 움츠러들었던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안정감을, 자신의 지난 부족함을 인정하고 올바른 사고로 나아가고자 하는 글린다를 보며 누군가는 삶의 개척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아직 바뀔 게 많은 현실과 냉정함이 있지만,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관객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용기가 늘 자리 잡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감히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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