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어느새 현대인들의 필수품이 됐다. 단순히 전화기로서의 기능 이상으로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연결하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고 네모난 기계가 제공하는 정보의 세계를 통해 수많은 텍스트를 접한다. 그중 가장 인기 있고 대중적인 방식은 소셜 네트워크가 아닐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FaceBook>, <Instagram>등의 플랫폼을 이용하며 다양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SNS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무엇이 대중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것일까? 개인적인 단상으로 '공유'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표면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단 방향적 정보제공과 동시에 불특정 다수 및 지인들의 일상을 수용하며 소통하는 양방향적인 문화 플랫폼인 것이다. 어쩌면 SNS는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자기 주체성과 존재 여부를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기능은 이를 향유하는 이들에게 비가시적인 형태의 독이 되기도 한다. 마치 극중 '벤(스티븐 연)'이 말하는 모럴 리티의 동시 존재처럼 말이다. SNS를 접하고 이용하다 보면 '종수(유아인)'의 말처럼 곳곳에 산재한 '위대한 개츠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얼굴, 이름, 직업도 모르지만 풍요롭게 삶을 누리는 '그들', 그들의 부유하고 화려한 일상을 관망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거나 우울을 겪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조적인 행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구태여 따분한 현대사회의 단편적인 문제를 서두에서 피력하는 이유는 이창동 감독이 <버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더욱 쉽게 접근해 보기 위함이다. 그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휴머니티와 다양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전개해 나간다. 또한 그가 영화로 그려내는 미장센을 통한 메타포는 쉽게 떠 마실 수 있는 수프(Soup)라기 보다 꼭꼭 씹어 삼켜야 제맛을 알 수 있는 쌀밥 같은 것이다. <버닝> 역시 그런 영화다. 영화를 본 뒤 몰아치는 당혹감을 잠시 뒤로 한 채 자신이라는 새로운 배역을 영화 속에 대입 시켜 보자 탄식보다는 탄복으로 영화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버닝>의 얼개는 이렇다. 유통회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어렸을 적 친구인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둘은 옛 기억을 되짚어가며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종수에게 맡긴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뒤 종수는 해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몇 주 후, 해미는 '벤(스티븐연)'이라는 남자와(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포르쉐를 몰며 강남의 좋은 집에 산다. 종수와 정반대의 환경) 아프리카에서 돌아온다. 종수는 둘의 관계에서 질투를 느끼고 시간이 지날수록 종수의 질투는 커져 가는데
어느 날, 해미와 벤이 종수의 집에 놀러와 함께 하루를 보내던 중 해미가 잠든 사이 벤이 종수에게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기이한 얘기를 하게 되고 며칠 뒤, 해미가 사라지자 벤을 의심한 종수는 그를 따라다니며 조금씩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간다.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인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을 퇴색 시키지 않으면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성을 온전하게 이입시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통해 총체적인 현 사회의 실태와 제반되는 문제를 ‘이종수(대한민국 청년의 상징)’라는 캐릭터를 둘러싼 몇 가지 시나리오 설정을 통해 보여주는데 첫째는 종수가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뉴스 아나운서의 보도를 통해 전달되는 '청년실업' 문제다. 뿐만 아니라 종수가 일자리를 구하러 간 곳에서 사람들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 일을 구걸하는 모습을 통해 변주되며 종수는 당연한 듯 어디 살고 야근은 할 수 있는지 묻는 인사담당자의 말을 무시한 채 그 자리를 뛰쳐나온다. 두 번째는 종수와 그의 가족 간의 관계다. 종수는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아픔과 제약을 겪는데 분노조절장애와 자신의 고집으로 재판을 받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파주의 고향 시골집에 내려와 지내면서 아무 말없이 소를 돌보는 것은(그것도 암소 한 마리) 기성세대를 돌봐야 하는 청년들의 의무감으로 비유될 수 있으며 종수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엄마의 전화를 받고 16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돈 얘기부터 꺼내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후 종수는 소를 팔아 버리며 책임이라는 의무감을 비워내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감독은 이 시퀀스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끊임없이 들리는 대남선전방송이다. 병역이라는 의무는 분단국가에 사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피해 갈 수 없는 희생이다. 하지만 그들이 소모하는 2년이라는 시간, 그 공백의 격차와 사회의 비협조적 지원 실태는 청년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다.
일련의 상황들이 꼬리 물듯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종수의 현재를 더욱 무망하게 만든다. 그가 느낄 절망감, 상실감, 무력감, 박탈감에 따른 분노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우리는 짓누르는 세태의 무게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어쩌면 ‘해결’ 되지 않는 당면 문제들은 불태워 없애듯 ‘해소’ 시켜야 옳을지 모른다.
종수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해미의 집에서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남산 타워와 하늘을 보며 자위한다.(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뒤부터 그녀의 집은 그녀의 공간이 아닌 종수의 우물로 변모된다.) 운 좋으면 한 번 볼 수 있는 작은 햇살을 갈구하며 창밖으로 날아가 세상에 닫고 싶은 그의 욕구를 해갈하는 행위인 것이다. 또한 해미의 집에 찾아가는 종수의 상황은 어렸을 적 해미가 우물에 빠졌을 때 느꼈을 절망감 또는 막연함과 같았을 것이며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욕구의 해갈 방식은 그녀가 종수의 집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석양 아래에서 추는 ‘그레이트 헝거’ 춤으로 변모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종수가 해미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동정이나 연민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방식들은 일회성에 그칠 뿐이다. 그런 ‘일시적 욕구 해소’는 완벽한 타개책으로 보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해소’만이 갈망과 분노의 종착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젊음을 박탈하는 모진 현실을 박차고 무너뜨리며 불태워 영원히 연소시켜야만 한다. 허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시간에 속박된 세상을 어떻게 불태운단 말인가? 그들의 욕구를 표현하고 분노를 표출할 상징물이 필요하다.
해미는 벤의 세계에 동화되고 싶어 하고 반대로 종수는 벤에게서 그를 무너뜨릴 이유를 찾는다. 그것이 해미에게는 무망한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나 종수에게는 자신의 무력감과 박탈감에 따른 분노 해소의 대상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종수와 벤의 대비는 확연하게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벤의 ‘포르쉐’와 종수의 ‘화물차’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부의 격차뿐 만 아니라 종수는 사라진 해미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온종일 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거의 따라잡았다 싶을 때면 더욱 빨리 도망가 버린다.) 그들을 잡는 카메라 프레임에서 역시 이 같은 차이를 알 수 있다. 벤을 따라 산길을 거슬러 올라 간 종수는 저수지를 바라보는 벤의 등 뒤, 언덕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 지켜보는 시퀀스와 빌딩 아래에서 종수를 내려다보는 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종수는 그를 줄기차게 따라다닐수록 자신의 무력감이 심화돼 가는 것을 느낀다. 끝내 그가 쫓는 건 해미의 행방이 아닌 자신의 분노를 해소할 대상을 점차 구체화시킨다.
벤이 해미를 죽였을 것이라는 확실한 물증은 없다. 관객들 역시 심증만 가지고 그가 무시무시한 유괴범이자 살인범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해미가 찬 시계가(종수가 준 시계) 벤의 화장실 서랍에서 발견되고 해미가 키우던 고양이 '보일'을 벤이 집에서 키우는 등의 심증적 단서를 던지지만 그 분홍색 시계는 해미의 동료도 차고 있었고 고양이 '보일'은 해미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종수가 매일 먹이를 주러 갔지만 한 번도 볼 수 없었다.(울음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상황 속에서 종수는 왜 그를 죽인 것일까? 해미의 실종으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단지 그를 죽여야 하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종수는 자신의 무력감과 박탈감에 따른 분노를 해소할 이유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종수는 벤을 죽이고 나서야 그의 포르쉐를 앞질러 간다. 활활 태워버린 그의 분노와 허물을 뒤로 한 채
이창동 감독은 극의 스릴과 사건 전개 상 미스터리를 더하기 위해 독특한 연출을 시도했다. 바로 ‘비닐하우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그’가 의미하는 ‘가끔 헛간을 태웁니다.’라는 대사 속의 메타포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 하고 찾아주는 이 없는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태워주길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지극히 에디터의 주관적인 생각) 영화 속에서 감독은(물론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비닐하우스를 맥거핀으로 사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종수와 함께, 불타 없어졌을지도 모를 비닐하우스를 추적하게 만들며 비닐하우스 어딘가 해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여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 지도에 태워 없어질 만한 비닐하우스의 위치를 표시하고 새벽의 안개 낀 스산한 마을을 배경으로 달리는 종수의 모습과 비닐하우스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종수의 등 뒤로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장면을 포커스 온 하여 인물의 혼란과 불안감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은 손이 닿지 않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슈들을 그의 첨예한 시각으로 발굴하여 영화 속 인물의 휴머니티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는 우리 삶의 대변인이자 세상을 비추는 창문 같은 감독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상을 있는 힘껏 끌어당겨와 풍경처럼 제시해주니 말이다.
물론 <시, 2010> 이후 8년 만인 이번 작품 <버닝>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타인의 삶과 세상을 마주하는 것 역시 그렇다. 복잡한 문제를 접했을 때 회피하지 말고 한 걸음씩 내디뎌 보는 건 어떨까? 풀 들이 봄을 무성하게 장식하기 위해 추운 겨울, 그 인고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듯이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청춘이 내포한 고통이자 시한적인 특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