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아닌 감정
손님을 10명만 받아도 자리가 꽉 차는 아담한 칵테일바에 갔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주량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근처에 칵테일바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지인이 단골집이라며 데리고 간 거였다. 화요일이라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지인은 이미 칵테일바 사장님과 친분이 상당했다. 그래서였는지 덩달아 나까지 사장님과 빠르게 친해졌다. 이미 주량을 초과한 지인이 옆에서 졸고 있을 때쯤, 커피 우유 맛 칵테일 한 잔으로 알딸딸해진 나는, 그에게 고민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요지는, 내가 최선을 다해 배려하고 맞춰주고 있는 상대가 있는데, 상대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들을 덧붙였다. '상대가 많이 바빠서 주변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건 이해한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거다', '내가 너무 타인에게 중심을 두고 사나 보다.' '이 관계를 지속해야 할지, 정리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이야기를 마치자 사장님은 무심한 듯 쉐이커를 흔들며 물었다. "그런데 그 쪽 기분은 괜찮아요?" 정말 쉬운 질문인데, 이상하게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아끼는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본인 감정이 상하기 시작하면 관계를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어떤 관계에서 기분이 나쁘기 시작하면 그 관계엔 문제가 있는 거다. 잘못이 누구에게 있든.
사장님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가 그 관계에서 진짜 괜찮은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괜찮지 않다는 결론이 났다. 상대의 상황을 이해한 것과 별개로 나를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마음 깊이 서운하고 속상했다. 상대를 오해하는 게 두려워 애써 이해해보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감정을 기준으로 삼으니, 오해라 해도 나 자신이 괜찮지 않다면 놓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이 관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분명해졌고, 상대를 대하는 순간순간 나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있었다.
감정이 왜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감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게 감정이 개입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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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의 제니퍼 러너 교수 연구진에 의하면 판단과 결정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 뇌에서 감정을 다루는 영역인 변연계와 전두엽에 불이 켜진다.
<적정한 삶> 中
'감정적으로 생각하지마.'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주변 인물들이 툭툭 내뱉는 말이다. 이토록 이성에 대한 강박이 지배하는 시대에, 판단에 있어서 감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짚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몸에 바짝 든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이성이 절실한 순간이 있다. 감정을 섣불리 쏟아내지 말아야 할 상황도 있다. 하지만 감정을 통제하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자유롭게 느끼는 쪽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성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만큼, 감정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감정도 근육처럼, 방치하면 쓰는 법을 까먹기 때문이다. 이성만으로 내리는 결정은 어쩌면 반쪽 짜리다. 그러니 나를 위한 결정을 제대로 내리려면, 감정에 집중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