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입체적이다.
상냥함은 보통 선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이중성을 숨기는 가림막이 된다. 사교계에서 가장 반짝였던 재스민은 남편의 외도와 사기 행각으로 모든 걸 잃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채 동생 진저를 찾는다. 마트 캐셔로 일하며 혼자 아들 둘을 키우는 진저는 재스민이 새로운 일을 구하고, 학업에 도전하는 걸 지지한다. 재스민이 틈만 나면 히스테리를 부려도 그런 예민함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 재스민과 함께 있을 때 진저는 분명 상냥하긴 하다. 하지만, 마냥 착한 동생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애매하다.
칠리 : 진저에게 들었는데 전 남편이 감옥에 있다죠?
재스민 : 목매달지 않았으면 아직 거기있겠지.
에디 : 목을 매달아요? 벨트로?
칠리 : 벨트나 침대시트겠지.
재스민 : 아뇨, 밧줄을 구했다나봐요. 그냥 밧줄요.
에디 : 힘이 있어야 그런 것도 구할텐데.
칠리 : 목 졸려 죽다니 참 짠하네.
재스민 : 목 졸려 죽는 게 아녜요. 목이 부러져서 죽는 거죠.
진저 : 그래도 싸. 사람들에게 상처 줬잖아. 나랑 오기, 자스민까지.
재스민 : 다들 잘못 알고 있어요. 목이 부러지는 건데.
칠리 : 이제 알았네요.
진저 : 나쁜 놈이야. 남의 돈으로 떵떵거리며 잘 살았잖아. 언니 몰래 바람도 피웠잖아.
재스민의 진저의 집을 찾은 첫 날, 진저는 재스민을 진심으로 배려했다면 애초에 만들지 않았을 상황을 만든다. 재스민과의 식사 자리에 예고도 없이 본인의 남자친구 칠리와 칠리의 친구 에디를 불러 함께 시내 구경을 다니고 술도 한 잔씩 걸친다. 알코올이 문제였을까, 칠리는 굳이 재스민의 전 남편 할의 자살을 대화 주제로 꺼내든다. 재스민의 상황을 공감하고, 앞날을 응원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심심한 국물에 소금을 톡톡 뿌리듯, 지루한 대화에 자극적인 얘기로 간을 맞추려는 목적이었다. 진저와 연인 관계에 있다보니 재스민의 상황을 낱낱이 전해들었을 거다. 하지만 당사자 앞에서 상대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건 다른 문제다. 이런 상황을 불편해하는 게 빤히 보이는 재스민을 앞에 두고, 진저는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칠리를 제지하기는 커녕, 재스민의 처참한 상황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눈치가 없어서 한 행동일 수도 있겠다. 사람마다 배려의 모습은 다르니까. 재스민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칠리와 에디를 불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진저가 보여주는 모습은 상냥하지만 그저 눈치가 없는 것뿐이라고 이해하기엔, 다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재스민을 따라 파티에 갔던 진저는 칠리를 두고 알이라는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알과 몇 번의 데이트를 즐긴 뒤, 진저는 재스민에게 묻는다.
진저 : 알이 칠리보다 나은 남자겠지?
재스민 : 웬만한 남자는 칠리보다 나아.
진저 : 알은 신사야.
재스민 : 그럼 당연히 더 낫겠네.
평소 칠리를 매우 못마땅해 하던 재스민에게 진저는 싫은 소리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재스민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던 진저는 그런 스크래치에 이미 이골이 나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기 마련이다.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는 재스민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탈바꿈했을 것이고, 그래서 본인이 새롭게 선택한 남자에 대해 재스민의 의견을 묻게 된 건 아니었을까. 아니, 애초에 칠리를 두고 알을 만나기로 한 것도 재스민이 칠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진저는 남자보는 눈이 없는 건 확실했다. 알고보니 알은 유부남이었고, 이어지는 신에서 진저는 칠리를 다시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와인잔을 꺼내들며 소소하게 재결합을 축하하기 시작한다.
칠리 : 이제 재스민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내 첫인상이 워낙 나빴잖아.
진저 :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언니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당신한테 루저라는데 더는 못참겠어.
괜찮은 남자를 만나라질 않나. 나한테 당신은 루저 아니야. 파티에서 만난 남자보다 두 배는 멋진 남자지.
재스민이 칠리를 무시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재스민의 발언을 진저가 마땅히 받아쳤던 적도 없다. 수긍하면 했지. 그런데 한 눈을 팔았던 남자가 임자가 있다는 걸 알자마자 칠리에게 되돌아가서는 재스민이 마치 칠리와 진저 사이를 방해한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물론 재스민도 이중적인 면이 있다. 한창 잘나갔을 때 재스민은 진저와 진저의 전남편 오기가 집에 방문했을 때 마치 하층민을 대하듯이 했다.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격이 떨어진다는 듯이, 진저 부부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불쾌하다는 티를 팍팍 내곤했다. 반대로 진저는 언니의 남편때문에 전재산을 날리고 이혼까지 했음에도 재스민을 보금자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재스민과 진저 중 누가 더 인격적으로 낫다고 얘기할 수 없다. 다만, 진저가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상냥함때문에 그녀가 가진 열등감이나 이중성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갭차이로 인해 그녀의 이중성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사실 <블루 재스민>은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채 잘 나가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미쳐가는 재스민의 심리를 따라 전개된다. 자신의 히스토리와 직업을 숨기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새출발을 하려는 대목에서 재스민의 허영심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허영심이 클라이막스를 찍음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는 신경쇠약증 역시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평범하지만 은근한 진저의 이중성을 백그라운드에 잔잔히 병치시킴으로써 관객이 인물을 평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재스민이 정상이고, 진저는 비정상인가? 재스민은 나쁜 사람이고, 진저는 착한 사람인가? 상냥한 사람은 모두 착한가? 친절함이 곧 진실됨을 보장하는가?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영화 <블루 재스민>은 진저와 재스민을 통해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입체적이라는 걸 말해준다.